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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부 — 심장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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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에서 29부에서 눈부신 빛을 거부하며 눈가리개로 진실을 지켜낸 우리는 드디어 마지막 문 앞에 섰다. 문은 돌이 아니라 심장처럼 울렁거렸다. 표면이 마치 고동치듯 미세하게 떨렸고, 가까이 다가가자 귓가에 심장 박동 같은 진동이 퍼져왔다. 문 위엔 짧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심장을 열어야 증언은 완성된다.” 의사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는 더 이상 감각이 아니야. 이번 방은 우리 존재 자체를 요구한다. 목소리도, 눈도, 귀도 아닌… 심장.” 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건 마지막 증언이자 최종 심판이야. 우리가 증언자라면, 결국 자기 심장을 열어 보여야 해.” 심장의 울림 문이 열리자, 방 안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아무 장치도, 아무 가구도 없었다. 대신 벽 전체가 심장처럼 붉게 빛나며 박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우리 다섯 명이 들어서는 순간, 박동은 우리 각자의 심장과 동조되듯 강약을 바꿨다. 은서가 놀란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가슴 안에서 뭔가가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곧 벽에 글자가 떠올랐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네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은서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노래하는 자의 심장 위에도 다른 문장이 떠올랐다. “너의 노래는 증언인가, 변명인가?”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행동하는 자의 가슴에선 또 다른 문장이 피어났다. “네 상처는 증거인가, 폭력인가?” 방은 우리 각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증언자로서의 마지막 확인 이었다. 심장을 열다 기록하는 자가 가장 먼저 무릎을 꿇고 가슴을 열 듯 두 손을 벌렸다. 그의 심장 위에서 오래된 잉크 자국이 글자로 변했다. “나는 기록했다. 내가 남긴 것은 거짓이 아니다.” 벽이 그의 글씨를 받아 적으며 붉은 빛을 더 강하게 뿜었다. 노래하는 자도 마침내 눈을 감고 노래를 흘려냈다. 소리는 없었지만, 그의 심장 위에서 빛이 노래처럼 퍼졌다. “내 노래는 고통이었고, 동시에 증언이었다.” 행...

29부 — 눈부신 어둠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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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과잉 28부에서 청각을 잃고 겨우 손글씨로 증언을 이어간 끝에 우리는 문을 통과했다. 그러나 29부의 시작은 정반대였다. 이번엔 침묵 대신 눈부신 빛 이 쏟아졌다. 처음엔 해돋이처럼 찬란했으나 곧 우리 시야는 새하얀 막으로 뒤덮였다. 눈꺼풀을 감아도 소용없었다. 과잉된 빛은 어둠과 다를 바 없었다. 의사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입모양만으로 말했다. ‘이건 눈을 빼앗는 방식이야. 빛이 너무 많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만들지.’ 은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받았다.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끔찍해요. 지금은… 가짜가 다 진짜처럼 보여요.” 우린 손을 맞잡았지만, 이번엔 감각조차 왜곡됐다. 서로의 손등에 문자를 새기려 했으나, 눈부심 속에 손가락이 여러 개로 겹쳐 보였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방은 과잉된 진실과 거짓을 뒤섞어 우릴 혼란에 빠뜨렸다. 빛으로 쓰여진 거짓 앞을 더듬다 우리는 거대한 벽을 만났다. 그 위에는 수많은 문장이 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우린 실패했다.” “네 목소리는 쓸모없다.” “너희의 이름은 지워졌다.” 모두 빛으로만 새겨진 문장이었다. 너무 눈부셔서 눈을 돌릴 수도 없었다. 지현이 이를 악물며 손바닥에 글자를 새겼다. ‘저건 가짜야. 진짜 기록은 빛에 새겨지지 않아. 몸과 목소리에 남는 거야.’ 기록하는 자가 허공에 종이를 꺼내 글씨를 남기려 했으나, 종이는 금세 빛에 녹아 사라졌다. 은서가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우린 빛을 거부해야 해. 보이지 않아야 진짜를 붙잡을 수 있어.” 자발적 눈먼 자 행동하는 자가 재빨리 옷자락을 찢어 눈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는 눈가리개를 만들어 우리 모두의 얼굴에 씌웠다. 처음엔 공포스러웠다. 빛이 사라지고, 세상은 다시 칠흑처럼 변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오히려 안정을 되찾았다. 의사가 손끝으로 글씨를 새겼다. ‘자발적으로 눈을 가려야 진짜가 보인다.’ 이 문장은 우리 모두의 심...

28부 — 귀머거리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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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끊긴 순간 27부에서 이름을 지켜내며 돌문을 열자, 이번엔 정반대의 감각이 무너졌다. 돌문을 통과하는 순간, 귀를 꽉 막는 듯한 압력이 몰려왔고, 그 뒤엔 완벽한 침묵 이 찾아왔다. 발소리도, 숨소리도, 심지어 심장의 박동조차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있었지만, 그 손끝의 떨림만이 우리가 아직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은서가 입술을 열어 무언가를 말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공포를 드러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 입술을 크게 움직여 보였다. “괜찮아. 우리가 아직 여기 있어.” 하지만 그녀가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곳은 청각을 빼앗아 증언의 도구를 무너뜨리는 방이었다. 이전까지는 목소리와 이름이 우리 무기였지만, 이제는 목소리가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몸짓과 기록만이 진실을 전달하는 수단 이 되었다. 몸짓의 언어 우린 급히 서로의 손바닥에 글자를 새기듯 쓰기 시작했다. ‘괜-찮-아.’ 은서가 내 손에 또박또박 글자를 그렸다. ‘우-린-같-이.’ 그렇게 우리는 손바닥의 필체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나 곧, 낯선 손길이 끼어들었다. 누구의 손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차갑고 거친 손끝이 내 손등에 이상한 글자를 새기려 했다. “거-짓-말.” 순간 소름이 온몸을 덮쳤다. 나는 재빨리 그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주변을 살폈지만, 귀가 닫힌 방에서는 방향조차 알 수 없었다. 오직 촉각만이 유일한 무기였다. 우리는 각자 손바닥에 ‘X’ 표시를 새겨 낯선 손길은 믿지 말자 는 약속을 다시 확인했다. 거짓 기록의 그림자 앞을 더듬어 나아가던 중, 발밑에 두툼한 책더미가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끝으로 넘긴 책장은 모두 비슷한 글귀를 반복하고 있었다. “우린 패배했다. 우린 잘못했다. 우린 침묵해야 한다.” 기록하는 자가 얼굴을 굳히며 글자를 적었다. ‘이건 그들이 만든 거짓 기록 이야. 우리가 믿도록 강요하는 문장.’ 그는 손끝으로 책장을 찢어냈다....

27부 — 눈먼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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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잃은 시작 안개를 가르고 들어온 순간, 우리의 시야는 서서히 닫혔다. 처음에는 주변의 경계가 흐려지더니, 이내 모든 형태가 잉크 번진 종이처럼 사라졌다. 남은 것은 차갑고 거친 바닥의 감촉, 그리고 서로의 숨소리뿐이었다. 의사가 낮게 말했다. “예상대로야. 이번 방은 시각을 제거해 남은 감각으로 우리를 시험하는 거지.” 지현이 발끝으로 바닥을 더듬으며 속삭였다. “누군가 우리를 끌고 가려 해도 눈으론 막을 수 없어. 대신, 귀와 손, 이름으로 버텨야 해.” 은서는 손바닥을 앞으로 뻗었다. 그녀의 손끝이 내 손을 찾았고, 다시 하나씩 팀원들에게 이어졌다. 보이지 않는 끈이 우리를 잇는 순간, 안개 속에서 먼 울림이 들려왔다. “—누가 처음 목소리를 불렀는가?” 방이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감각을 빼앗는 기만 천장에서 미묘한 바람이 흘러내렸다. 동시에 똑같은 발자국 소리가 우리 주위를 빙빙 돌았다. 눈을 잃은 대신 귀를 믿어야 하는데, 소리는 분명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 는 착각을 주었다. 행동하는 자가 낮게 외쳤다. “모두 제자리에! 움직이면 패턴에 먹힌다!” 그러나 이미 한 발자국 늦었다. 기록하는 자가 비명을 억누르며 말했다. “내 팔을 누가 잡아—!” 하지만 곧 알았다. 그것은 실제 손이 아니라, 공기의 압축과 울림이 만든 환영의 손 이었다. 의사가 침착하게 설명했다. “청각과 촉각을 혼동시키는 장치다. 여기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방법은 단 하나— 이름 으로 불러 확인하는 것.” 나는 즉시 은서의 이름을 불렀다. “은서!”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여기 있어!” 이름이 진짜 존재를 증명했다. 사라지는 동료, 그리고 되찾기 우린 이름을 서로 불러가며 한 줄로 전진했다. 그러나 노래하는 자의 목소리가 중간에 끊겼다. “여… 기…” 그 뒤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은서가 당황해 외쳤다. “어디 있어요?!” 방은 그의 목소리를 조롱하듯 반향으로 되뿌렸다. “여기… 여기… 여기…” ...

26부 — 목소리가 돌아오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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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에 선 숨 문이 열리자 바람도 없는 공간에서 얇은 공기의 물결이 우리 얼굴을 스쳤다. 방은 넓지 않았지만 층층이 포개진 아치가 깊이를 끝없이 늘려 보이게 했다. 천장에서 늘어진 오래된 스피커들은 전원이 빠진 채 입을 다물고 있었고, 바닥 중앙에는 둥근 원형 무대가 깔려 있었다. 무대 둘레엔 유리관이 사방향으로 뻗어 있었는데, 그 안을 흐르는 것은 전선도 물도 아닌, 잔잔한 잔향과도 같은 빛의 먼지 였다. 침묵의 복도를 지나오며 메말랐던 귀가 순간 웅 하고 미세한 저음을 느꼈다. 지현이 손바닥으로 공기를 가르며 속삭였다. “여긴… 소리를 되돌리는 곳이야.” 아직 우리 목소리는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직전의 완전한 무음은 아니었다. 한 음절씩, 비늘처럼 떨어져 나가던 침묵이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는 느낌. 의사는 벽에 박힌 금속판의 주파수 눈금을 살피더니 턱짓했다. “청각 자극 복원… 단계적. 너무 빨리 말하면 역류가 일어나.” 기록하는 자가 목울대를 쓸며 작은 숨을 내뱉었다. 그 소리가 방 안에서 둥글게 퍼졌다. 은서는 녹음기를 가슴에 꼭 붙였다. 빨간 표시등이 규칙적으로 깜박이고, 아주 낮게 기계의 심장 같은 맥박이 전해졌다. 반향 기계와 이름의 위치 무대 위에 난간만한 높이의 기계가 놓여 있었다. 표면엔 스크래치와 각인, 그리고 낡은 라벨: REV-CHAMBER / 인가 없는 재생 금지 . 내부 증언자가 어깨를 기울여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원통형 공명관이 세 겹으로 겹쳐져 있고, 중앙 링에는 작게 각인된 좌표가 줄지어 있었다. “PLATFORM 3 / 08 / H-308 / 발화 / 메아리 방 / 검은 서명” —우리가 지나온 문장들의 목록. 행동하는 자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우릴 위해 설계됐다는 듯… 아니, 우릴 다시 설계하려는 장치야.” 그때 무대 아래쪽에서 푸른 불빛이 켜졌다. 바닥의 원형 홈이 돌면서 우리 발 위치를 규정하려 들었다. “서 있지 말고 서게 하려는군.” 지현이 반원을 그리며 우리를 재배치했다. “원...

25부 — 침묵의 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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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사라진 길 우리가 들어선 복도는 기묘했다. 발걸음을 옮겨도 발소리가 없었고, 손가락이 벽을 스치는데도 아무 울림이 없었다. 은서는 두려움에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공기 자체가 소리를 삼키는 듯했다. 지현이 미리 정해둔 신호를 꺼내 들었다. 두 번 두드리면 정지, 세 번은 우회, 한 번 길게는 후퇴 없음. 우리는 서로의 눈빛을 의지하며 무음 속을 걸어갔다. 복도의 벽은 하얀 대리석처럼 매끈했지만 자세히 보면 수많은 균열이 선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 균열 안에는 마치 잉크가 굳어 검은 실핏줄처럼 박혀 있었다. 행동하는 자가 손으로 그 금을 더듬자, 미세하게 떨림이 퍼졌다. 그러나 그 떨림마저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오직 몸으로만 느낄 수 있었다. 의사가 손바닥에 작은 손전등을 비추며 기록했다. “여긴 청각 차단만이 아니라, 증언의 원천 을 고갈시키려는 장치야. 목소리 없는 자는 곧 자기 자신을 부정하게 되지.” 기록하는 자가 펜촉을 꾹 눌러 종이에 선을 그었다. 그 소리마저 나지 않았지만, 글씨가 남는다는 사실이 우리를 조금 안심시켰다. 보이지 않는 관객 복도는 끝없이 이어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바닥에 작은 원형 홈이 파여 있었다. 원 안에는 발자국처럼 보이는 흔적이 찍혀 있었고, 그 크기와 방향은 제각각이었다. 내부 증언자가 몸을 굽혀 살폈다. “이건 단순한 흔적이 아니야. 우리 이전에 통과한 자들이 남긴 ‘무음 발자국’이지.” 갑자기 등 뒤에서 기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소리는 없었지만, 확실히 누군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봤을 때, 복도의 끝자락에 수십 개의 의자가 줄지어 놓여 있었고, 그 위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의자 등받이에 희미하게 눌린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관객 들이 거기 앉아 있는 것처럼. 은서가 손으로 녹음기를 움켜쥐었다. 기계는 침묵했지만, 빨간 불빛이 여전히 깜빡이며 살아 있었다. “이곳은… 우리가 공연하는 무대 같아요...

24부 — 심연의 두 번째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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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는 계단, 떠오르는 이름들 문턱을 넘자 바닥이 아주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이 아니라, 거대한 승강판이었다. 사방 벽면에는 오래된 플라스터 위로 이름들이 불규칙하게 새겨져 있었다. 비슷한 획, 비슷한 높이, 그러나 분명 서로 다른 손끝의 떨림. “선택을 미룬 자들” 이라는 표식이 희미한 조명 속에서 번졌다. 은서는 한 이름 앞에서 멈추었다. 박해문 . 그녀의 손끝이 떨렸다가 멈췄다. “아빠가… 여기를 지나갔어요.” 지현은 숨을 고르며 주변을 훑었다. “각인은 ‘통과’의 의미일 수도, ‘구속’의 의미일 수도 있어. 아카이브는 늘 두 개의 문을 동시에 만들지.” 행동하는 자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계기를 살폈다. “내려가는 속도, 일정해. 3:08에 맞춰 심층부와 동기화하려는 거야.” 내부 증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부터는 기록과 기억, 그리고 목소리가 서로의 경계선을 녹인다. 우리가 들을 소리는 우리 것이 아닐 수도 있어.” 노래하는 자는 갈라진 목으로 아주 낮은 으음음을 흘려 우리 호흡의 리듬을 묶었다. 그 단조로운 음이 공포를 눌러 주었다. 반전 기록실 — 읽히는 자가 기록된다 승강판이 멈추자 앞에 아치형 문이 열렸다. 안쪽은 밝았다. 기록열람실 이라는 명패가 문틀에 박혀 있었지만, 내부 배치가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책상 위엔 열람자 기록카드가 있었고, 카드마다 글씨가 쓰이다 중단된 흔적이 선명했다. 기록하는 자가 카드를 집어 들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선 읽기가 곧 쓰기야. 책을 펼치는 순간, 독자의 망설임과 시선까지 기록 된다.” 의사가 주변을 돌며 필터 박스를 열었다. “공기 중에 미세 잉크 입자… 흡입하면 혀 밑 점막을 통해 문장 패턴이 박힌다. 읽는 사람의 내적 독백이, 반대로 저장돼.” 은서가 본능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지현이 말없이 마스크를 건넸다. 내부 증언자가 벽면의 유리 진열장을 가리켰다. “여길 봐. ‘반대 증언’ 섹션.” 진열장 안에는 손바닥만 한 판막들이 줄지어 있고, 각 판막에는 단문들이 새겨져 있...

23부 — 검은 아카이브의 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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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으로, 첫 걸음 3:08. 강철문이 진동하며 낮게 울렸다. 순간, 거대한 문이 열리며 서늘한 공기가 몰려나왔다.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잉크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은서는 녹음기를 더욱 단단히 쥐었고, 지현은 숨을 고르며 무기를 고쳐 잡았다. 다섯 증언자들은 한 명씩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 문을 지나면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우두머리는 문 앞에서 물러나며 낮게 웃었다. “들어가 봐라. 너희가 불길이라고 믿는다면, 이 어둠에서 스스로 증명해라.” 우린 계단을 내려갔다. 바닥은 축축했고, 벽마다 무한대의 표식이 겹겹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끝없이 반복되는 시간의 흔적 같았다. 은서가 속삭였다. “아버지가… 여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해문은 여길 지나갔다. 그의 흔적은 반드시 남아 있을 거야.” 기억의 복도 지하 깊은 곳으로 들어서자, 좁은 복도가 이어졌다. 벽에는 수천 개의 서류함이 줄지어 있었고, 각 서류함엔 날짜와 숫자가 적혀 있었다. “2005-06-15 / 회수 기록” , “2012-11-30 / 삭제 명령” , “2021-03-08 / 증언 거부” … 기록하는 자는 떨리는 손으로 원고에 적어 내려갔다. “여기는 단순한 아카이브가 아니야. 사람들의 목소리, 기억, 사건… 모두 강제로 재단된 기록이야.” 은서가 서류함을 열려 했지만, 내부 증언자가 손을 막았다. “함부로 열면 안 돼. 이건 단순한 종이가 아니야. 읽는 순간, 네 기억에 새겨진다.” 순간, 어둠 속에서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돌려줘… 내 이야기를…” 다은이 귀를 막으며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 속삭임은 멈추지 않았다. 복도는 살아있는 듯,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첫 번째 시험 복도의 끝, 우리는 거대한 홀에 도달했다. 중앙에는 검은 강철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수십 개의 마이크가 줄지어 있었다. 마이크는 자동으로 켜져 있었고, 가까이 다가가자 목소...

22부 — 검은 아카이브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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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으로 향하는 발걸음 성채의 잿더미를 뒤로 하고, 우리는 북쪽 구역으로 향했다. 오래 전 봉쇄된 산업지대, 지도에도 더 이상 표시되지 않는 구역이었다. 가로등은 모두 부서져 있었고, 전선은 잘려진 채 매달려 있었다. 은서는 녹음기를 껴안은 채 걸었고, 지현은 여전히 부러진 팔을 고정한 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다섯 증언자들은 각자의 상처를 지닌 채, 그러나 서로를 지탱하며 걸었다. “여긴… 아무도 살지 않는 도시 같아요.” 은서가 낮게 속삭였다. 내부 증언자가 대답했다. “살지 않는 게 아니라, 살지 못하게 막은 거지. 여기는 기억을 묻어버린 구역이야. 사람들이 여기서 본 것을 말하지 못하게 만들었어.” 우린 모두 알고 있었다. 이곳 어딘가에 검은 아카이브 가 숨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설계자의 심장부, 가장 은밀한 기억 저장소라는 것을. 폐허의 전조 밤이 깊어가며 공기는 더 차가워졌다. 오래된 건물 벽에는 검은 낙서가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308을 지켜라.” , “증언은 불꽃이다.” , “설계자는 듣고 있다.” 서로 모순된 메시지들이 겹쳐 있었다. 노래하는 자가 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건 누군가의 외침이야. 지워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친 흔적이지.” 기록하는 자가 그 문장을 옮겨 적으며 중얼거렸다. “증언은 살아있다. 지워진 글씨도 여전히 남는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느꼈다. 그림자가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설계자의 요원들이 아니었다. 더 조용하고, 더 오래된 무언가였다. 은서가 몸을 움츠렸다. “누가… 지켜보고 있어요.” 아카이브의 문 폐허의 끝, 오래된 지하철 역 입구가 나타났다. 철문은 녹슬어 있었지만, 그 위에는 여전히 선명하게 무한대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내부 증언자가 낮게 말했다. “여기야. 검은 아카이브의 입구.” 우리는 숨을 고르며 계단을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차가운 공기가 밀려왔다. 계단 아래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검은 강철로 만들어진 문...

21부 — 잿더미 위의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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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성채, 남겨진 불빛 성채가 무너진 새벽, 도시의 하늘은 잿빛 먼지로 뒤덮였다. 콘크리트 파편이 아직도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사람들은 붉은 눈으로 서로를 부축하며 광장을 빠져나갔다. 은서는 흙먼지로 얼룩진 얼굴로 녹음기를 품에 안았다. 기계는 깨졌지만, 그 속의 목소리만은 살아 있었다. 지현은 부러진 팔을 고정시키며 낮게 말했다. “여긴 끝났지만… 설계자들은 이걸로 무너지지 않아. 오히려 더 거세게 반격할 거야.”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빛을 잃은 사람들의 눈동자 속에, 여전히 작은 불씨가 남아 있었다. 합창은 멈췄지만, 그 여운이 골목마다 메아리쳤다. “어쩔 수 없다”는 말 대신, 사람들은 낮게 속삭였다. “우린 선택할 수 있다.” 증언자들의 회합 남쪽 시장의 폐허 건물 안에서 우리는 다시 모였다. 다섯 증언자는 모두 살아남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전투의 흔적으로 뒤덮여 있었다. 의사의 손엔 깊은 상처가, 노래하는 자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기록하는 자의 원고는 절반이 불에 타 있었다. “하지만 증언은 남았어.” 기록하는 자가 탄 원고 조각을 펼치며 말했다. “이 도시가 기억하는 한, 그들은 절대 지우지 못해.” 내부 증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설계자 내부에서도 균열이 커지고 있어. 오늘의 방송이 그들에게도 균열을 심었지.” 은서는 숨을 고르며 물었다. “그럼 이제 우린 어디로 가야 해요?” 지현이 대답했다. “그들의 심장부는 아직 남아 있어. 북쪽 구역, ‘검은 아카이브’.” 설계자의 반격 밤이 깊어지자, 검은 우산을 든 자들이 다시 거리를 메웠다. 그들은 무너진 성채를 포위한 채 불을 질렀다. 불길은 잔해를 태우며, 살아남은 이들의 기억마저 삼키려는 듯 타올랐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 외쳤다. “도망쳐! 그들은 아직 살아있어!” 나는 은서의 손을 붙잡았다. “이대로 흩어지면 다시 지워진다. 우리 목소리를 모아야 해.” 그러나 설계자들의 우두머리 격인 사내...

20부 — 잿빛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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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그림자 비가 멎은 도시는 낯설 만큼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는 곧 폭풍을 예고하는 숨이었다. 은서는 지친 얼굴로 녹음기를 가슴에 안고 걸었고, 지현은 끝없이 무기를 점검하며 긴장된 숨을 내쉬었다. 우리 앞에 솟은 것은 잿빛 성채—설계자의 외곽 요새였다. 건물 외벽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오래된 균열을 품고 있었으나, 내부는 최신 보안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기록하는 자가 종이에 빠르게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여기, 남쪽 벽에 배수구. 그게 가장 약하다.” 행동하는 자가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약한 만큼 피도 많이 날 거야.” 불씨를 지키는 합창 성채 앞 공터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방송국 습격 이후 흘러나온 ‘반대 증언’을 들은 이들이었다. 노래하는 자가 그 무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 낮게, 그러나 힘 있는 음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그 목소리에 따라 사람들은 촛불처럼 작은 불빛을 켜들었다. 은서는 그 광경을 보며 속삭였다. “아버지가 말한 마지막 문… 바로 이 사람들 사이일지도 몰라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이 불씨를 성채 안까지 가져가야 해.” 의사가 상처 난 손을 들어올리며 덧붙였다. “오늘 우리가 증언을 지키지 못하면, 내일은 아무도 말하지 못할 거요.” 침투와 분열 우리는 세 갈래로 갈라졌다. A팀은 배수구를 통해 내부 통로로 진입했고, B팀은 옥상 송신기를 장악하기 위해 사다리를 탔다. C팀은 군중 사이에 섞여 외부를 지키며 합창을 이어갔다. 그러나 설계자들의 그림자도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우산을 든 자들이 광장 가장자리에 나타났고, 그들의 눈빛은 사람들의 불빛을 끄려는 찬 바람 같았다. 행동하는 자가 무전을 날렸다. “내부에 침입자 감지. 전투 준비.” 동시에 내부 증언자가 낮게 외쳤다. “분열을 막아라! 그들이 원하는 건 서로의 불신이다!” 성채의 심장으로 나는 지현과 함께 제어실로 향하는 긴 복도를 달렸다. 벽에는 무한대의 표식이 끊임없이 이어지...

19부 — 심장부 침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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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위의 균열 새벽이 밀려오자 비는 잠시 숨을 죽였다. 우리는 버려진 창고에 둔 야전 테이블 위로 지도를 펼쳐놓고 둘러섰다. 내부 증언자가 표시한 붉은 동심원은 도시의 중앙, 설계자의 본거지— 코어 아키브 를 가리키고 있었다. 의사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곳은 기억 회수와 주입의 관문이오. 그 문을 닫지 못하면, 우리는 매번 같은 밤을 다시 살게 될 거요.” 노래하는 자는 갈라진 목으로 낮게 허밍을 붙이며 긴장을 눌렀고, 기록하는 자는 종이 가장자리에 조밀한 글씨로 통로와 경비 교대 시간을 옮겨 적었다. 행동하는 자는 붕대를 고쳐 매며 한마디만 던졌다. “들어가 부수고, 나오면 된다.” 은서는 내 옆에서 숨을 길게 토했다. “아버지가 말한 ‘문’… 그게 바로 코어 아키브의 심장일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그 문은 3:08 에 열린다. 우리는 그 이전에 안으로, 그 이후에 밖으로.” 세 갈래의 작전 침투 계획은 단순하지만 잔인했다. A팀 (나와 지현, 행동하는 자)은 지하 냉각덕트를 통해 내려가 제어실을 장악한다. B팀 (내부 증언자와 기록하는 자)은 백업 라인으로 침투해 회수 로그를 조작, 증거를 외부 노드로 실시간 분산한다. C팀 (은서와 의사, 노래하는 자)은 외곽 스피커와 옥상 송신기를 장악해 ‘반대 증언’의 합창을 도시 전역에 송출한다. 성호는 마지막 페이지에 굵은 선을 그으며 적었다. “3:00 집결, 3:04 돌입, 3:08 문 변조, 3:12 이탈.” 우리 모두 이 시간이 생존과 몰락의 경계가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검은 탑의 문턱 코어 아키브는 외관만 보면 평범한 데이터 센터였다. 그러나 유리 파사드 뒤에선 무수한 기억의 관들이 하얀 서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입구 로비는 텅 비어 있었으나, 바닥 센서가 밟을 때마다 미세한 초음파의 떨림이 발목을 두드렸다. 지현이 귓속마이크로 속삭였다. “정면 경비 없음. 대신 깊숙한 곳에서 열감지. 우회한다.” 우리는 비상계단을 지나 서비스 복도로 파고들었다....

18부 — 흔들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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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반응 증언이 세상으로 퍼져 나간 지 하루가 지났다. 도시는 술렁였다. 거리의 전광판에는 우리가 흘린 영상이 반복 재생되었고, 라디오와 휴대폰 방송에도 증언이 스며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여들어 수군거렸다. “저건 뭐지? 진짜였던 거야?” “설계자가 만든 세계가 가짜였다니…” 많은 이들이 두려움에 떨었지만, 일부는 눈빛이 달라졌다. 그들의 마음속에 작은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은서는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사람들이 듣기 시작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설계자들이 이대로 두진 않겠지. 그들은 반격할 거야.” 분열의 시작 의사는 사람들을 모아 작은 모임을 열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실험에 가담했던 자요. 하지만 동시에 피해자였소. 나는 이제 증언자로서 살겠소.” 사람들은 놀랐지만,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진실을 말한다면, 우리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 노래하는 자는 거리의 한복판에서 노래를 불렀다. 쉰 목소리였지만, 사람들은 울며 따라 불렀다. 그 노래는 증언이자 선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설계자의 대변인이 미디어에 등장했다. 그는 차갑게 말했다. “그들의 말은 거짓이다. 허위 증언이다. 그들은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반역자들이다.” 사람들의 표정은 갈라졌다. 믿는 자와 의심하는 자가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설계자의 역습 그날 밤, 방송국이 불길에 휩싸였다. 설계자의 군세가 역습을 감행한 것이다. 지현이 총을 들고 달려왔다. “방송국이 공격받았어! 우리가 점령한 송출실을 다시 빼앗으려는 거야.” 행동하는 자는 주먹을 움켜쥐며 외쳤다. “놈들에게 증언을 지우게 둘 순 없다!” 우린 즉시 거리로 나갔다. 불길 속에서 설계자의 무리들이 도시를 장악하려 하고 있었다. 내부 증언자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들은 내 동족이었지만, 이제는 내 적이다. 내가 직접 그들의 심장을 겨누겠다.” 불꽃의 확산 전투는 치...

17부 — 증언의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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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결의 우리는 다섯 명의 증언자와 함께 도시 외곽의 폐허 위에 서 있었다. 비는 그치지 않았지만, 그 속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고 있었다. 의사, 노래하는 자, 기록하는 자, 행동하는 자, 내부의 증언자. 그들의 눈빛은 서로 달랐지만, 모두 같은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은서는 녹음기를 품에 안고 말했다. “아버지가 말했어요. 증언은 흩어져서는 아무 힘이 없다고. 하지만 이제는 다 모였어요.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건 하나뿐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드러내는 것. 설계자의 언어를 꺾고, 우리의 언어를 세우는 것.” 성호는 공책에 굵게 적었다. “17부 — 증언을 세상에 전하라.” 전파를 향한 길 지현은 지도를 펼쳐 보였다. “이 도시에서 증언을 가장 멀리 퍼뜨릴 수 있는 곳은 방송국이다. 하지만 이미 설계자의 손에 넘어간 상태일 거야.” 내부 증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곳은 그들의 거짓된 메시지를 내보내는 심장부다. 하지만 그 심장을 뒤집으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노래하는 자는 쉰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 “내 노래가 다시 울려 퍼질 수 있겠군.” 행동하는 자는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그곳에서 싸워야 한다면, 내 몸으로 길을 열겠다.” 기록하는 자는 종이를 펼쳐들며 속삭였다. “방송국 내부 구조는 이미 도면에 있다. 나는 오래전 그곳을 그려두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목적지는 분명했다. “방송국을 점령하라.” 방송국으로 우리는 빗속을 뚫고 방송국으로 향했다. 건물은 거대한 검은 탑처럼 도시 중앙에 서 있었다. 입구는 철문으로 막혀 있었고, 무장한 경비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지현은 낮게 말했다. “정면 돌파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뒷문은 취약하다. 그들은 늘 정면만 신경 쓰지, 그림자 속은 무시한다.” 우리는 빌딩 후면의 좁은 통로로 몸을 숨겼다. 내부 증언자가 문을 열며 속삭였다. “이제부터는 되돌릴 ...

16부 — 다섯 번째 증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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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 단서 우리는 도시의 외곽을 떠돌았다. 첫 번째 증언자인 의사, 두 번째 증언자인 노래하는 자, 세 번째 증언자인 기록하는 자, 네 번째 증언자인 행동하는 자—네 명이 우리 곁에 있었다. 그들의 몸은 지쳐 있었지만, 눈빛은 점점 강해졌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한 명, 다섯 번째 증언자였다. 은서는 녹음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떨렸다.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 이제 들어야 해요.” 버튼이 눌리고, 박해문의 목소리가 잡음 속에서 흘러나왔다. “…다섯 번째는, 설계자들 가운데 있었다. 그는 그들의 언어로, 그러나 우리를 위해 말하려 했다. 그는 배신자로 불렸지만, 진실로는 증언자였다.” 우린 모두 숨을 삼켰다. 지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설계자 내부의 증언자라니… 위험한 인물이야.” 성호는 공책에 굵게 적었다. “다섯 번째 증언자 — 내부의 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린 설계자의 심장부로 들어가야 해.” 설계자의 심장부 우리가 도착한 곳은 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거대한 빌딩이었다. 모든 창문은 검은색으로 가려져 있었고, 입구는 철문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의사는 몸을 떨며 속삭였다. “여긴… 내가 끌려왔던 곳이오.” 노래하는 자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내 노래가 처음 꺾였던 곳이기도 하지.” 기록하는 자는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이 건물의 도면. 나는 이곳을 이미 그려놨다.” 행동하는 자는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마침내 끝장을 볼 수 있겠군.” 우리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어둠 속에서 불빛이 켜지고, 검은 코트를 입은 무리들이 우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마지막 증언자의 등장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다른 설계자들과 달리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빛, 그러나 그 속에는 깊은 피로가 묻어 있었다. “너희가 나를 찾았군.” 은서는 숨을 삼켰다. “당신이… 다...

15부 — 네 번째 증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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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길목에서 폐허가 된 도서관을 빠져나온 뒤, 우리 일행은 무너진 도심 외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의사, 노래하는 자, 기록하는 자—세 명의 증언자가 우리 곁에 있었지만, 그들의 몸과 마음은 이미 지쳐 있었다. 은서는 품에 안은 기록 묶음을 조심스럽게 만지며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말했어요. 다섯 명의 증언자가 필요하다고. 이제 남은 건 두 명이에요.” 성호는 공책을 열어 굵은 글씨로 적었다. “네 번째 증언자 — 단서 필요.” 지현은 주위를 살피며 경계했다. “설계자들이 우릴 그대로 두진 않을 거다. 네 번째 증언자는 분명 그들의 감시 아래에 있을 거야.” 나는 숨을 고르며 은서에게 말했다. “녹음기를 다시 들어봐. 아버지가 단서를 남겼을 거야.” 아버지의 네 번째 암시 은서는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잡음 뒤로 박해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번째는 행동으로 증언하는 자였다. 그는 말보다 행동으로 진실을 드러냈다. 설계자들의 실험을 깨부수며, 자신의 몸으로 저항을 기록했다. 그의 흔적은 상처와 흉터로 남아 있다.” 은서가 눈을 크게 떴다. “행동으로 증언하는 자라니… 그건 무슨 뜻일까요?” 나는 낮게 말했다. “말이나 글이 아니라, 직접 부딪치며 진실을 남긴 사람일 거야. 몸에 새겨진 상처가 그 증언이라는 거지.” 지현은 짧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흔적을 따라가야 해. 싸움이 있었던 곳, 저항의 흔적이 남은 곳.” 성호는 공책에 적었다. “네 번째 증언자 — 행동. 장소: 저항의 폐허.” 저항의 폐허 우리는 오래전 폭발 사고로 폐허가 된 공장 지대로 향했다. 녹슨 철골 구조물이 밤하늘을 향해 기괴하게 솟아 있었고, 바람에 흔들리며 금속성이 울렸다. 바닥에는 오래전의 전투 흔적이 남아 있었다. 탄피, 불에 그을린 흔적, 그리고 무너진 벽. 그곳은 분명 누군가 격렬히 저항했던 장소였다. 은서는 낮게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이곳을 말한 걸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14부 — 세 번째 증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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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폐허 속 단서 우리는 비에 젖은 도로를 따라 다시 걸었다. 첫 번째 증언자인 의사, 두 번째 증언자인 노래하는 자는 이미 지쳐 있었지만, 여전히 우리 곁을 지켰다. 은서는 녹음기를 켜며 아버지의 다음 메시지를 찾았다. “…세 번째는 기록하는 자였다. 그는 설계자의 도면을 훔쳐, 종이 위에 진실을 남겼다. 그 기록은 설계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무기였다.” 성호는 공책에 굵은 글씨로 적었다. “세 번째 증언자 — 기록하는 자.” 지현은 낮게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글을 따라가야 해. 잉크와 종이, 그것이 남은 흔적을 찾으면 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계자가 두려워할 만큼의 기록이라면,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을 거야.” 도서관의 그림자 우리가 도착한 곳은 도시 중앙의 폐허가 된 도서관이었다. 문은 오래전에 봉쇄되었지만, 담장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도서관은 이미 무너져 있었고, 천장은 빗물에 젖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책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젖은 책 속에서 누군가 일부러 남긴 듯한 흔적이 보였다. 은서가 책 한 권을 꺼내자, 그 안에서 종이 조각이 떨어졌다. 종이에는 308 — 기록 보관소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성호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308… 아버지가 말한 시간과 같다. 이건 우연이 아니야.” 지현은 주위를 살피며 경계했다. “설계자들도 이 단서를 알고 있을 거다. 서두르자.” 기록하는 자와의 만남 우리가 도서관 지하로 내려가자, 어두운 공간 속에서 누군가 펜을 들고 있었다. 낡은 코트 차림의 노인이었다. 그는 종이 위에 끊임없이 글을 쓰고 있었다. 은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이… 기록하는 자입니까?” 노인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이름이 없다. 다만 기록만 남길 뿐이다.” 그는 종이에 선명한 글씨로 이렇게 적고 있었다. “설계자의 실험은 인간을 세 조각으로 찢는다. 기억을 지운 자, 목소리를 잃은 자, 기록...

13부 — 두 번째 증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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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를 벗어나며 우리는 비 내리는 병원을 빠져나와 도시 외곽으로 향했다. 첫 번째 증언자인 의사는 여전히 몸을 떨며 우리 곁에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공허했지만, 입술은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기억은 지워졌다… 하지만, 남는다… 소리 속에 남는다…” 은서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당신의 목소리는 지워지지 않아요. 아버지가 그걸 알았어요.” 지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설계자들이 잠시 물러난 건, 우릴 추적하기 위한 포석일 거야. 이제부턴 더 조심해야 해.” 성호는 공책에 적었다. “첫 번째 증언 확보 — 다음 단서: 박해문의 두 번째 암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은서에게 말했다. “녹음기를 다시 들어봐. 두 번째 증언자에 대한 단서가 있을 거야.” 아버지의 두 번째 암시 은서는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잡음 사이로 박해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번째는 노래하는 자였다. 그는 설계자의 언어를 바꾸고, 기억을 다른 목소리로 옮겼다. 그의 목소리는 노래가 되었고, 그 노래는 저항이었다.” 은서가 눈을 크게 떴다. “노래하는 자라니… 가수였던 사람인가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노래는 기록의 또 다른 형태야. 그가 목소리로 기억을 보관했다면,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 흔적이 남아 있을 거야.” 지현은 짧게 말했다. “우리가 찾아야 할 곳은 무대다. 하지만 그 무대는 아마 지금은 폐허일 거다.” 성호는 공책에 적었다. “두 번째 증언자 — 노래하는 자. 장소: 옛 공연장.” 옛 공연장으로 우린 오래된 지하 공연장으로 향했다. 도시는 점점 더 어두워지고, 네온사인조차 희미해졌다. 공연장은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였고, 입구에는 ‘철거 예정’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문을 밀자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밀려왔다. 무대 위에는 오래된 마이크가 여전히 세워져 있었고, 객석 의자들은 반쯤 부서져 있었다. 은서는 무대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여기서… ...

12부 — 첫 번째 증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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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속의 단서 카페 ‘발화’의 불빛이 사라지고, 우리는 다시 어둠 속 도시로 들어섰다. 파괴된 창문 너머로 바람이 불어오며 유리 파편이 덜컥거렸다. 은서는 여전히 녹음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지만, 그 속에는 더 이상 두려움만이 있지 않았다. “아버지가 남긴 말, 기억하죠? 다섯 명의 증언자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성호는 공책을 꺼내 굵은 글씨로 적었다. “첫 번째 증언자 — 누구인가?” 지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박해문은 이 도시에서 혼자가 아니었어. 그와 같은 실험에 휘말렸던 이들이 반드시 있어. 그중 누군가는 살아서 남아 있을 거야.”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증언자를 찾으려면, 아버지가 남긴 또 다른 흔적을 따라야 해.” 은서는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잡음 끝에 다시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은 북쪽의 의사였다. 그는 기억을 지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우린 서로를 바라봤다. “의사?” 지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가 바로 첫 번째 증언자야.” 의사의 흔적 북쪽 역을 벗어나 오래된 병원 건물로 향했다. 도시는 비에 젖어 있었고, 네온사인의 불빛은 꺼져 있었다. 병원은 이미 폐허였다. 창문은 모두 판자로 막혀 있었고, 현관문은 녹슬어 삐걱거렸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서자, 썩은 냄새와 약품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벽에는 오래된 차트들이 흩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깨진 유리병이 널려 있었다. 성호는 벽에 붙은 낡은 포스터를 발견하고 읽었다. “기억 소거 연구 — 환영 강연.” 지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기억을 지우는 연구라니… 박해문이 말한 게 이거였군.” 은서는 벽에 손을 얹고 낮게 말했다. “아버지는 이 병원에서 뭘 봤던 걸까요.” 나는 눈을 좁히며 어두운 복도를 살폈다. “그 답을 찾아야 해. 증언자는 이 안에 있을지도 몰라.” 기억을 잃은 남자 2층 병실 ...

11부-하 — 발화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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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화의 문을 지나 문이 열리자, 습한 터널 공기와는 전혀 다른 온기가 밀려왔다. 은서는 눈을 크게 뜨며 속삭였다. “여긴… 지상이에요.” 우리가 발을 들여놓은 곳은 오래된 카페였다. 벽은 갈라졌고, 천장은 금이 갔지만, 분명히 한때 사람들로 붐비던 공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문 옆 간판에는 희미하게 ‘발화’ 라는 글자가 남아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여기가 아버지가 말한 장소구나.” 지현은 카운터 위에 남겨진 낡은 전화기를 주목했다. 수화기를 들어 올리자, 마치 아직 연결된 것처럼 작은 잡음이 흘러나왔다. “이건 단순한 장식이 아니야. 이곳은 여전히 누군가의 증언을 받아들이고 있어.” 성호는 공책에 크게 적었다. “발화 = 증언의 장.” 아버지의 목소리 우리가 자리에 앉자, 은서는 떨리는 손으로 녹음기를 켰다. 오래된 테이프가 돌아가며, 박해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남긴 기록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반복되는 실험의 증언이다. 누군가는 피해자가 되고, 누군가는 가해자가 된다. 그러나 모두가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자기 자리를 합리화한다.” 은서는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아버지…”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만약 네가 이 소리를 듣고 있다면, 너 역시 선택의 길에 서 있다. 기억해라. 발화는 시작일 뿐, 진실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지현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는 알고 있었어. 우리가 여기까지 올 걸.” 나는 녹음기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정말 설계자의 일부였을까, 아니면 반역자였을까. 매복자들 은서가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이, 카페 문이 쾅 하고 열렸다.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들이 들어섰다. 소매 끝의 은색 ∞ 문양이 번뜩였다. 그들 중 하나가 낮게 말했다. “여기까지 올 줄 알았다. 목소리는 우리 것이다. 넘겨라.” 지현은 권총을 꺼내 겨누었다. “여긴 증언의 장이다. 네놈들의 협박이 기록될 뿐이야.” 총구가 서로를 ...

11부 중 — 기록을 둘러싼 추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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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총성 철제 문이 완전히 닫히기도 전에 금속성이 울렸다. 누군가 바깥에서 강제로 문을 열려는 소리였다. 지현은 재빠르게 총을 장전하며 은서에게 몸을 낮추라고 손짓했다. “우린 시간이 없어. 곧 들어올 거야.” 은서는 손에 쥔 녹음기를 꽉 잡으며 물었다. “이 기록… 꼭 지켜야 하나요?” 지현은 차갑게 대답했다. “기록은 곧 증거야. 증거는 살아남는 이유지.”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금속 벽을 스치고 흩어진 파편이 은서의 얼굴을 스쳤다. 나는 그녀를 감싸 안고 몸을 숙였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야.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아카이브 안쪽으로 달렸다. 플랫폼을 따라 뻗은 어두운 통로, 그 끝에는 희미한 빛줄기가 새고 있었다. 숨겨진 통로 통로 끝에는 벽돌로 막힌 듯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니 벽돌 사이에서 차가운 바람이 스며나왔다. “이건 가짜 벽이야.” 내가 중얼거렸다. 성호가 공책에 그림을 그리듯 벽의 문양을 기록했다. “여길 지나면 다른 플랫폼으로 연결될 거야. 아버지가 남긴 흔적일지도 몰라.” 우리가 벽을 밀자, 미묘한 금속음과 함께 틈이 열렸다. 그 안에는 좁은 계단이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지현은 앞장서며 말했다. “빨리 내려가. 이 위에선 오래 버틸 수 없어.” 우리가 계단을 내려가자 위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설계자의 하수인들이 이미 아카이브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은서는 숨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우릴 끝까지 따라오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우린 더 깊이 숨어들어갈 수 있어.” 기록의 무게 계단 아래에는 또 다른 방이 있었다. 벽에는 오래된 방송 장비와 마이크가 늘어서 있었고, 녹음 테이프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방 한쪽에는 “발화” 라는 단어가 크게 쓰인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은서는 떨리는 손으로 테이프 하나를 꺼냈다. 그 위에는 박해문 1997 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눈물이 맺힌...

11부-상 — 북쪽 역의 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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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로 향하는 발걸음 해가 완전히 지기도 전에 우리는 북쪽 폐역을 향했다. 도시는 여전히 붉은 네온사인과 사람들의 소음으로 가득했지만, 역 주변으로 갈수록 공기가 바뀌었다. 오래된 철골 구조물은 녹슬어 있었고, 유리창은 대부분 깨져 있었다. 비에 젖은 돌바닥은 미끄러웠고, 담벼락에는 검게 번진 곰팡이가 길게 뻗어 있었다. 은서는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여기… 아버지가 남겼다는 흔적이 있을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을 거야. 하지만 그것이 답일지, 함정일지는 아직 몰라.” 지현은 담배를 꺼내려다 주머니를 다시 닫았다. “냄새조차 위험 신호가 될 수 있어. 설계자들이 이곳을 그냥 두었을 리 없지.” 그녀의 눈빛은 냉정했고, 긴장 속에서도 계산적이었다. 역 입구는 오래 전부터 봉쇄된 듯 굳게 잠겨 있었지만, 낡은 철문에는 새로운 용접 자국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최근에 드나든 흔적이었다. 나는 손전등을 꺼내 철문 옆의 좁은 틈새를 비췄다. 녹슨 자물쇠 뒤쪽엔 작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 — 설계자의 상징. 은서는 떨리는 손끝으로 그 표식을 더듬었다. “아버지가 이곳을 선택한 게 맞다면, 그도 이 문양을 본 거겠죠.” 나는 낮게 대답했다. “혹은 그 문양을 남긴 사람들 사이에 있었을 수도 있어.” 역사의 그림자 철문을 억지로 밀어 열자, 곰팡이 냄새와 습기가 동시에 밀려왔다. 안쪽은 긴 플랫폼으로 이어져 있었고, 광고판은 다 뜯겨나간 채 녹슨 철골만 남아 있었다. 그 위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성호는 공책을 펴서 그림처럼 빠르게 메모를 남겼다. “역사 구조 — 봉인, 습기, 그리고 새겨진 코드. 시간은 3:08, 장소는 북역. 퍼즐은 맞춰지고 있어.” 지현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들려?” 우린 숨을 죽였다. 멀리서 기계음 같은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울려왔다. 마치 오래된 발전기가 깨어날 때 나는 금속성 울림.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누군가 아직 여길 사용하고 ...

10부 — 균열 속의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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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골목의 회의 새벽 다섯 시가 지나자, 도시는 묘한 정적에 잠겼다. 비는 멎었지만 공기 속에는 습기와 피로가 가득했다. 우리는 광장 뒤편의 골목으로 숨어들어갔다. 지현은 젖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단호했지만, 오랫동안 쫓겨 다닌 흔적이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제 너희도 알겠지.” 지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설계자들은 단순한 집단이 아니야. 그들은 도시의 어둠 속에서 기억을 지배하고, 진실을 삭제해 왔어. 하지만 그 안에서도 균열이 커지고 있다.” 은서는 두 손을 움켜쥐며 물었다. “아빠… 정말 살아 있는 거죠?” 지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확실히 알 수 없어. 다만… 이 도시에 숨겨진 ‘세 번째 아카이브’에 단서가 남아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 아카이브? 도서관 말고도 더 있다는 건가?” “그래. 첫 번째는 네가 찾은 도서관. 두 번째는 터널 속 메아리의 방.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설계자들조차 두려워하는 장소지. 거기에 박해문이 남긴 ‘마지막 증언’이 있을 거야.” 설계자의 그림자 지현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골목 끝에서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은서를 뒤로 숨기고 파이프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나타난 건 낯선 남자였다. 그는 검은 코트를 입었지만, 소매 끝에 은색 ∞ 핀은 달려 있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레 다가오며 속삭였다. “난… 내부자다. 설계자의 하수인으로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들의 방식에 회의적인 자 중 하나다.” 지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네가 왜 여길 찾아왔지?” 남자는 주머니에서 작은 메모지를 꺼내 우리에게 건넸다. 그 위에는 한 줄이 적혀 있었다. “308, 세 번째 아카이브의 열쇠.”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다. 하지만 조심해라. 설계자 내부에서도...

9부 — 새벽의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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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위로 떠오른 새벽 터널을 빠져나오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빗줄기는 잦아들었지만, 도시는 여전히 젖어 있었다. 가로등 불빛은 희미하게 깜빡였고, 도로 위에는 물웅덩이가 거울처럼 반사되어 있었다. 은서는 무릎을 꿇고 숨을 고르며 속삭였다. “살았다… 드디어 살아남았어요.”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우린 단지 한 막을 넘겼을 뿐이야.” 멀리서 시계탑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벽 네 시. 그러나 우리에게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숫자가 아니었다. 3시 8분 이라는 숫자가 계속해서 귓가를 울렸다. 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아빠는… 정말 아직 살아 있을까요?” 나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잖아. 살아있든, 남겨진 기록이든… 어쨌든 그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어.” 폐허가 된 광장 우린 도심의 오래된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때 시민들의 집회 장소였던 이곳은 이제 낡은 벽보와 부서진 벤치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광장은 기묘하게도 비어 있지 않았다. 검은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원형으로 서 있었다. 모두의 소매 끝에는 은색 ∞ 핀이 달려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는 높은 단상이 있었고, 거기에는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다른 추적자들과 달리 얼굴을 가리지 않았고, 목소리는 또렷했다. “…선택은 없다. 그러나 목소리는 남는다. 우리는 증거를 지배하고, 기억을 지배한다.” 은서가 내 옆에서 몸을 움츠렸다. “그들이예요… 설계자의 중심부.” 나는 숨을 고르며 속삭였다. “맞아. 이제 우린 무대 한가운데로 들어온 거야.” 첫 정면 대치 단상 위의 남자가 우리를 발견하자 미소를 지었다. “아, 드디어 나타났군. 박해문의 딸, 그리고 그의 동반자.” 그의 목소리는 군중을 휘감으며 퍼졌다. “네 아버지는 우리 중 하나였지. 하지만 동시에 배신자이기도 했다. 그는 기록을 남겼고, 그것이 지금 너희 손에 있다. 넘...

8부 — 터널 속의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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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심장부 터널은 상상보다 길고 깊었다. 열차의 굉음이 지나간 뒤에도 귀가 멍멍했고, 숨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벽에는 수십 년 된 낙서와 기호가 남아 있었는데, 대부분은 누군가 급히 남긴 듯 불안정한 필체였다. 은서는 손전등을 켰지만, 좁은 빛줄기만이 앞길을 비췄다. 그 빛은 어둠 속에 갇힌 먼지와 습기를 드러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설계자들이 여기도 알고 있을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시의 어둠은 전부 그들의 무대야. 우리가 숨는다고 해도 결국은 같은 연극 안에 있는 거지.” 그러나 나는 동시에 깨닫고 있었다. 이 터널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었다. 박해문이 남긴 또 다른 흔적 이 분명히 여기 있을 터였다. 낡은 벽의 기호 한참을 걸어가자 벽에 이상한 표시가 나타났다. 분필과 페인트가 섞인 듯한 기호였다. 세모 안에 숫자 308 이 적혀 있었고, 그 옆에는 희미한 글자가 보였다. “기억은 지워져도, 목소리는 남는다.” 은서가 눈을 크게 떴다. “아빠가 늘 말하던 문장이에요. 그는 항상 목소리를 기록하는 게 가장 확실하다고 했어요.” 나는 벽을 손끝으로 짚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여긴 단순한 터널이 아니야. 녹음실… 아니, 실험실이었던 거야.” 우린 더욱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바닥에는 오래된 카세트테이프 껍질들이 흩어져 있었고, 일부는 아직도 테이프가 감긴 채 남아 있었다. 은서는 하나를 주워 귀에 대고 흔들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단호해졌다. “여기 어딘가에… 아빠 목소리가 있어요.” 설계자의 손길 터널 안쪽에서 낯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지직거리는 라디오 잡음이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어둠 속에서 검은 코트를 입은 두 명의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 역시 은색 ∞ 핀을 달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라디오를 돌리자,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3시 8분, 다시 시작된다...

7부 — 도망자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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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으로 들어온 불빛 계단을 오르자 눈앞에 펼쳐진 건 낯설지만 익숙한 도시의 밤 풍경이었다. 빗줄기가 아스팔트 위로 쏟아지고, 네온사인 간판들이 번쩍였지만, 그 모든 게 비에 젖어 흐릿하게 일렁였다. 숨이 차올라 가슴이 터질 듯했지만, 은서와 나는 멈추지 못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는 여전히 또렷했고, 검은 세단의 헤드라이트는 빗속에서도 우리를 쫓아왔다. 은서가 헐떡이며 속삭였다. “그들이 벌써 따라왔어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사람 많은 곳으로 가야 해. 인파 속에 숨어야 살아남을 수 있어.” 우린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번화가로 들어섰다. 비에 젖은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고, 차도에는 택시와 버스가 뒤엉켜 있었다. 이곳은 더 이상 지하가 아니었다. 하지만 설계자들의 눈은 어디에든 있었다. 나는 은서의 손을 잡으며 낮게 속삭였다. “도시는 우리를 감출 수도 있고, 더 쉽게 드러낼 수도 있어.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관건이야.” 군중 속의 추적 우린 번화가 한복판을 걸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휴대폰을 보며 지나갔고, 커피숍 앞에서는 손님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러나 내 눈은 한 곳에 꽂혔다. 인파 속에서 똑같은 검은 코트를 입고, 은색 ∞ 핀을 단 사람들이 서너 명 눈에 띄었다. 그들은 분명 우리를 향해 천천히 좁혀 오고 있었다. “선생님…” 은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그녀를 지하철역 입구 쪽으로 이끌었다. “사람 많은 곳으로 들어가자. 거기서 흩어지면 우리가 유리해.” 지하철역 안은 빗물에 젖은 인파로 붐볐다. 사람들은 우산을 접고 개찰구를 지나가느라 바빴다. 우리는 군중 속에 섞여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는 여전히 집요했다. 설계자들의 눈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었다. 개찰구를 넘어서 계단을 내려가자, 갑자기 역 내부 방송이 울려 퍼졌다. “승객 여러분, 현재 3시 8분을 기점으로 열차 운행이 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