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부-상 — 북쪽 역의 봉인

폐허로 향하는 발걸음

해가 완전히 지기도 전에 우리는 북쪽 폐역을 향했다. 도시는 여전히 붉은 네온사인과 사람들의 소음으로 가득했지만, 역 주변으로 갈수록 공기가 바뀌었다. 오래된 철골 구조물은 녹슬어 있었고, 유리창은 대부분 깨져 있었다. 비에 젖은 돌바닥은 미끄러웠고, 담벼락에는 검게 번진 곰팡이가 길게 뻗어 있었다.

은서는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여기… 아버지가 남겼다는 흔적이 있을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을 거야. 하지만 그것이 답일지, 함정일지는 아직 몰라.”

지현은 담배를 꺼내려다 주머니를 다시 닫았다. “냄새조차 위험 신호가 될 수 있어. 설계자들이 이곳을 그냥 두었을 리 없지.” 그녀의 눈빛은 냉정했고, 긴장 속에서도 계산적이었다.

역 입구는 오래 전부터 봉쇄된 듯 굳게 잠겨 있었지만, 낡은 철문에는 새로운 용접 자국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최근에 드나든 흔적이었다. 나는 손전등을 꺼내 철문 옆의 좁은 틈새를 비췄다. 녹슨 자물쇠 뒤쪽엔 작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 설계자의 상징.

은서는 떨리는 손끝으로 그 표식을 더듬었다. “아버지가 이곳을 선택한 게 맞다면, 그도 이 문양을 본 거겠죠.” 나는 낮게 대답했다. “혹은 그 문양을 남긴 사람들 사이에 있었을 수도 있어.”

역사의 그림자

철문을 억지로 밀어 열자, 곰팡이 냄새와 습기가 동시에 밀려왔다. 안쪽은 긴 플랫폼으로 이어져 있었고, 광고판은 다 뜯겨나간 채 녹슨 철골만 남아 있었다. 그 위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성호는 공책을 펴서 그림처럼 빠르게 메모를 남겼다. “역사 구조 — 봉인, 습기, 그리고 새겨진 코드. 시간은 3:08, 장소는 북역. 퍼즐은 맞춰지고 있어.”

지현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들려?” 우린 숨을 죽였다. 멀리서 기계음 같은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울려왔다. 마치 오래된 발전기가 깨어날 때 나는 금속성 울림.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누군가 아직 여길 사용하고 있어.” 은서는 눈을 크게 뜨며 속삭였다. “그렇다면 아버지도…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거죠?” 지현은 차갑게 웃었다.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중요한 건 기록이야. 진실은 언제나 기록에 묶여 있거든.”

첫 번째 봉인

플랫폼 끝으로 가자 거대한 철문이 나타났다. 문 위에는 ‘출입 금지’라고 적힌 낡은 팻말이 매달려 있었지만, 아래쪽엔 은색 페인트로 새겨진 ‘3-08’이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은서는 숨을 삼켰다. “이건… 아버지가 남겼던 번호와 똑같아요.” 나는 손전등을 문 쪽으로 비추며 말했다. “여기가 첫 번째 봉인일 거야.”

문을 밀자, 움직이지 않았다. 지현이 허리를 숙여 자물쇠를 확인했다. “비밀번호 방식이야. 단순히 힘으로 여는 게 아니야. 하지만 이건 전자식이 아니라, 기계식 회전 자물쇠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은서를 바라봤다. “너, 혹시 아버지가 남긴 소리 기록… 아직 가지고 있지?” 은서는 떨리는 손으로 녹음기를 꺼냈다. 버튼을 누르자 낡은 테이프 소리가 흘러나왔다. 박해문의 목소리였다.

“…언제나 세 번째, 그리고 여덟 번째. 그것이 내 습관이었다.”

지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3과 8. 숫자의 조합. 문을 여는 키야.”

우리는 자물쇠를 천천히 돌렸다. 세 번째, 그리고 여덟 번째. 금속이 끼익 하며 돌아가더니, 곧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 너머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숨겨진 기록실

안쪽은 작은 아카이브처럼 보였다. 벽에는 수십 개의 철제 서랍이 줄지어 있었고, 그 위에는 숫자와 기호가 적힌 라벨들이 붙어 있었다. 공기에는 종이와 곰팡이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성호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여긴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누군가의 개인 기록 보관소야.” 은서는 떨리는 눈으로 서랍들을 살폈다. “아버지가 여길 쓴 걸까요? 아니면…” 나는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서랍 중 몇 개는 열려 있었고, 안에는 오래된 테이프와 카세트, 그리고 두꺼운 노트가 보였다.

지현은 서류 하나를 꺼내 펼쳤다. 거기엔 ‘프로젝트 H-308’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봐. 단순한 개인 기록이 아니야. 이건 실험이자 프로젝트였어.”

나는 목구멍이 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면 박해문은 실험 대상이 아니라, 연구자였던 건가?” 은서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버지는 피해자였어요. 그럴 리 없어요.” 지현은 차갑게 대꾸했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엔 선이 없어. 기록만이 진실을 말해줄 뿐이야.”

침입자의 그림자

우리가 문서들을 뒤적이던 순간, 플랫폼 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금속을 밟는 뚜렷한 소리. 은서는 숨을 죽였고, 지현은 재빠르게 권총을 꺼내들었다.

플랫폼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코트 소매 끝에 은색 문양을 단 남자들. 그들은 설계자의 하수인이었다.

한 사내가 낮게 말했다. “역시 여기까지 왔군. 봉인을 건드린 자는 기록을 넘겨야 해.” 지현은 총을 겨누며 대답했다. “넘기고 싶은 기록 따윈 없어. 하지만 네놈들의 최후는 기록될 거야.”

공기는 단숨에 얼어붙었다. 나는 은서의 손을 잡고 속삭였다. “지금부터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야. 끝까지 따라올 거다.”

은서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떨림 속에서도 그녀의 눈빛에는 굳은 결심이 깃들어 있었다.

다음 길목을 향해

우리는 기록 몇 개를 급히 챙겨 가방에 넣고, 아카이브의 다른 쪽 출구를 찾아 움직였다. 벽에는 오래된 지도 같은 낙서가 남아 있었고, 그중 하나가 희미하게 빛났다. ‘발화(發話) — 카페’.

성호는 낙서를 메모하며 중얼거렸다. “발화… 처음 만났던 다방의 이름. 시작으로 돌아가라는 암시일지도 몰라.”

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다음 단서는 거기야. 하지만 그 전에 이놈들을 뿌려야지.”

그 순간, 발자국 소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철제 문 너머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은서는 녹음기를 꽉 움켜쥐며 속삭였다. “아버지… 이게 정말 당신이 원한 길이라면, 끝까지 갈게요.”

그리고 봉인된 역사의 문은 천천히 닫혀가며, 또 다른 전투의 서막을 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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