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부 — 귀머거리의 방
소리가 끊긴 순간
27부에서 이름을 지켜내며 돌문을 열자, 이번엔 정반대의 감각이 무너졌다. 돌문을 통과하는 순간, 귀를 꽉 막는 듯한 압력이 몰려왔고, 그 뒤엔 완벽한 침묵이 찾아왔다. 발소리도, 숨소리도, 심지어 심장의 박동조차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있었지만, 그 손끝의 떨림만이 우리가 아직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은서가 입술을 열어 무언가를 말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공포를 드러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 입술을 크게 움직여 보였다. “괜찮아. 우리가 아직 여기 있어.” 하지만 그녀가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곳은 청각을 빼앗아 증언의 도구를 무너뜨리는 방이었다. 이전까지는 목소리와 이름이 우리 무기였지만, 이제는 목소리가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몸짓과 기록만이 진실을 전달하는 수단이 되었다.
몸짓의 언어
우린 급히 서로의 손바닥에 글자를 새기듯 쓰기 시작했다. ‘괜-찮-아.’ 은서가 내 손에 또박또박 글자를 그렸다. ‘우-린-같-이.’ 그렇게 우리는 손바닥의 필체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나 곧, 낯선 손길이 끼어들었다. 누구의 손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차갑고 거친 손끝이 내 손등에 이상한 글자를 새기려 했다. “거-짓-말.” 순간 소름이 온몸을 덮쳤다.
나는 재빨리 그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주변을 살폈지만, 귀가 닫힌 방에서는 방향조차 알 수 없었다. 오직 촉각만이 유일한 무기였다. 우리는 각자 손바닥에 ‘X’ 표시를 새겨 낯선 손길은 믿지 말자는 약속을 다시 확인했다.
거짓 기록의 그림자
앞을 더듬어 나아가던 중, 발밑에 두툼한 책더미가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끝으로 넘긴 책장은 모두 비슷한 글귀를 반복하고 있었다. “우린 패배했다. 우린 잘못했다. 우린 침묵해야 한다.”
기록하는 자가 얼굴을 굳히며 글자를 적었다. ‘이건 그들이 만든 거짓 기록이야. 우리가 믿도록 강요하는 문장.’ 그는 손끝으로 책장을 찢어냈다. 그러나 찢긴 종이는 곧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마치 거짓이 스스로를 복원하는 듯했다.
지현이 우리 모두의 손에 같은 문장을 새겼다. ‘거짓 기록은 되살아난다. 하지만 진짜 기록은 손에 남는다.’ 우리는 종이가 아니라 서로의 피부에, 그리고 작은 수첩에 단어를 새겨 넣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진짜 기록을 증인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사라진 노래하는 자
어느 순간, 노래하는 자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우린 재빨리 그의 이름을 손바닥에 써서 돌려가며 확인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은서가 눈을 크게 뜨며 허공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것은 거대한 금속 종(鐘)이었다. 종 표면에는 수많은 손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분명히 노래하는 자의 필체였다. “난 아직 여기 있어. 하지만 내 목소리는 갇혔다.”
우린 종을 두드려보려 했으나, 아무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대신 종의 표면이 파문처럼 흔들리며 더 많은 글자를 토해냈다. “되찾으려면, 네 몸이 곧 북이 되어야 한다.”
행동하는 자가 팔을 걷어붙이고 종 앞에 섰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강한 진동을 만들었다. 그 진동이 종으로 전달되자, 미약하지만 금속의 떨림이 손끝에 전해졌다. 곧 종의 표면에서 노래하는 자의 손길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살아 있었지만, 목소리 대신 몸 전체가 기록이 된 것이었다.
출구와 다가오는 경고
마침내 종이 갈라지며 새로운 문이 열렸다. 그 문 위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손끝으로 읽었다.
“귀가 닫혀도, 손과 몸은 증언한다. 거짓은 종이 울리지 못한다.”
우린 손에 손을 맞잡고 문을 통과했다. 이번에도 소리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손끝과 심장의 떨림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었다.
마지막 순간, 등 뒤에서 차가운 글씨가 새겨졌다. 누군가 우리를 향해 손으로 문장을 남긴 것이다. “너희의 다음 감각은 빛일 것이다. 빛을 잃을 때, 진실도 눈부시다.”
우린 서로를 바라볼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지만, 글자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남았다. 그리고 알았다. 28부의 시험은 끝났지만, 더 가혹한 감각의 박탈이 기다리고 있음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