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비밀정원, 첫 문을 두드리다
1부 — 아래층에서 위를 본다는 것
창문이 반쯤 땅에 묻힌 반지하 방. 창틀과 맞닿은 벽에는 여름 장마 때마다 스며든 습기의 흔적이 희끄무레한 곰팡이 지도를 그려 두었다. 석민은 그 지도에서 늘 북쪽을 찾듯 시선을 위로 올렸다. 위층 사람들의 발걸음, 복도에서 누가 웃고 떠들었는지, 분리수거하는 시간에 들려오는 플라스틱 부딪히는 소리까지, 옅은 진동으로 그의 하루를 흔들었다. 일터가 문을 닫은 지 석 달, 구직 사이트의 알림은 매번 ‘경력 우대’라는 얼룩 같은 문장을 남겼다. 그 얼룩이 지워지지 않는 동안, 반지하의 공기는 습기와 가스 냄새, 그리고 부모의 낮은 한숨으로 더 포개졌다.
어머니 다은은 새벽마다 가까운 식당에서 김치통을 나르고, 오후에는 동네 카페에서 설거지와 바닥을 닦았다. 아버지 성호는 전기 공사 현장에 일감이 생기면 나갔지만, 일이 뜸한 날이면 집 안에 쌓아 둔 낡은 콘센트와 케이블을 들여다보며 ‘쓸모’의 길을 더듬었다. 오래된 부품을 닦아 새것처럼 포장하는 손놀림은 능숙했지만, 그 ‘새것’은 늘 집 안에서만 반짝였다.
그날도 비가 오려는지 도시의 기압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노란 형광등 아래, 석민은 중고 노트북 화면을 넘기다가 채팅창으로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대학 동기였던 지후였다. “야, 너 영어 과외 아직도 하나도 안 잡혔냐?”라는 인사 뒤에, 지후는 사진 한 장을 보냈다. 청담 언덕 위, 유리 박스로 둘러싸인 대저택. 마당 끝의 은빛 수영장과 휘어진 소나무, 비에 젖어도 번들거리는 돌계단. 그 사진만으로도 ‘위’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지후는 말했다. “윤 회장네. 광고 대기업. 딸이 중2라는데, 외국 학교 준비 한다더라. 내가 유학 가서 그만둬야 해서—대체 과외 구하는 중.” 입 안이 마른 석민은 장난처럼 웃는 이모티콘을 붙여 물었다. “하루에 얼마?” 돌아온 금액은 그의 한 달 알바비의 절반에 가까웠고, 그 숫자 하나로 반지하의 공기가 조금은 맑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문제는 증명이었다. 경력, 출신 학교, 자격증 번호, 추천인. 지후는 솔직하게 말했다. “여긴 형식 중시하긴 하는데, 결국 첫인상과 과제 한번 보면 끝. 집 구조가… 남다르거든.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게임이 시작이야.” 남다르다. 남다르다는 말은 부러움과 경계, 그리고 기회를 동시에 품은 단어였다. 석민은 곧장 집 안의 작은 프린터를 꺼내 종이를 채웠다. 깔끔한 폰트로 정리한 이력서, 언어 교육 봉사활동 사진 몇 장—실제 날짜와 장소를 맞추기 위해 SNS에 남겨 둔 소소한 기록을 뒤져 타임라인을 꿰었다.
다은은 오래된 다리미를 꺼내 셔츠의 주름을 눌러 주었다. 다림질 소리와 함께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거기 과외는… 잘 되겠니?” 석민은 어깨를 펴고, 주머니 속 메모를 꺼내 보였다. 윤 회장, 배우자 차인정, 큰아들 윤이안, 딸 윤소연. 개의 이름은 ‘몽슈’. 알레르기 없음. 주말엔 가족이 종종 지방 별장으로 이동. 과외 시간은 평일 오후가 유력. 집 안의 예술품은 유명 작가의 설치작, 만지지 말 것.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차분하게 다듬었다. “준비는 내가 할게. 들어갈 방법만 찾으면 돼요.”
종이 위에 그린 사다리
인터폰 앞에 섰을 때,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언덕의 곡선이 그를 위아래로 잰 듯했다. 비스듬히 깎인 잔디,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 집 안에서 바깥을 향해 고요하게 켜진 전등들. 정장을 입은 경비가 시선으로 그를 훑었고, 인터폰 화면 속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소연 과외 보러 오셨죠?” 그는 숨을 고르고, 미리 준비해 둔 미소를 꺼내 들었다. “네. 석… 서준입니다.” 낯선 가명을 입에 붙이는 것은 생각보다 빠르게 익숙해졌다. 가명은 하나의 껍질이었고, 그 껍질이 단단할수록 안쪽의 떨림은 티가 나지 않았다.
문이 열리자, 집의 냄새가 그를 감쌌다. 나무와 석재, 향초와 비, 그리고 돈의 냄새. 돈에는 향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날 그는 처음으로 그 향을 맡았다. 현관에서 마주한 여자는 차인정이었다. 무릎 아래로 흐르는 실크 원피스, 매끈한 귀걸이, 부드럽지만 질문을 빼놓지 않는 목소리. “지후가 추천해서요. 포트폴리오를 보내 주셨던데, 영어 에세이 지도가 가능하다고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에서 파일을 꺼냈다. 그는 수많은 샘플 에세이를 밤새 수정해 ‘자신의 작업’으로 꾸며 두었다. 문장 곳곳엔 실수를 일부러 심어 두었다. 너무 완벽하면 의심 받는다—그는 인터넷 어딘가에서 본, 상류층 입시 코치의 조언을 기억해 두었다. 완벽은 가끔 가면을 찢는다. 적당한 흠은 사람을 안심시킨다.
넓은 거실을 지나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반지하와는 반대로, 낮은 곳으로 갈수록 아름다운 공간이 펼쳐졌다. 지하라 불러도 아깝지 않은, 지하 같지 않은 층. 반쯤 지면에 묻힌 곳에 거대한 창이 산책길과 수영장을 마주했다. 빗줄기가 유리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동안, 윤소연이 책상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기심 많고, 살짝 지루해 보이는 눈. 그 눈빛은 성적표 숫자에 익숙하고, 부모의 기대라는 단어의 무게를 이미 알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소연이 먼저 말했다. “저, 단어를 외우는 건 괜찮은데, 글을 쓰면 문장이 뻣뻣해요.”
“그건 좋은 출발이에요.” 그는 반사적으로 답했다. “뻣뻣함을 알아차리는 건, 이미 문장을 관찰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는 펜을 꺼내 노트에 간단한 게임을 적었다. ‘세 줄 서사’. 첫 줄엔 장면, 둘째 줄엔 움직임, 셋째 줄엔 변화를 적자고 했다. 그는 아이와 함께 ‘비 오는 날의 수영장’이라는 장면으로 시작했다. 소연이 첫 줄을 쓰고, 그가 둘째 줄을 이었다. 세 번째 줄은 다시 소연의 차례였다. 아이는 잠시 창밖의 비를 보고, 마지막 줄을 적었다. “그래도 물은 선명해서, 내가 어디 서 있는지 보였다.”
차인정은 뒤에서 조용히 그들을 지켜봤다. 그는 일부러 가끔씩 설명을 멈추고 아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게 하는 질문. 아이의 얼어붙은 어휘가 풀리자, 차인정의 고개가 거의 imperceptible 하게 끄덕여졌다. 그 작은 고개 끄덕임이 이 집의 문지방을 조금 더 낮춰 주는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 그는 가방을 정리하며 파일 하나를 더 밀었다. ‘학습 계획서 초안(4주)’이라는 제목 아래, 매주의 목표와 과제가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사실 그 계획서는 지난밤에 인터넷 자료를 모아 ‘맞춤형’처럼 꾸민 것이었지만, 여기선 ‘맞춤처럼 보이는 것’이 곧 진실이었다. 차인정은 파일을 넘기며 물었다. “혹시, 시간 더 내실 수 있나요? 소연이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마음속에서는 작은 종이 사다리가 한 칸 올라갔다. 그 사다리는 아직 얇고, 구겨지기 쉬웠지만, 손으로 잘 펴면 다시 오를 수 있었다. 돌아가는 길, 그는 인터폰 앞에서 잠깐 멈춰 뒤를 돌아봤다. 빗줄기 너머로 보이는 집의 선은 너무도 매끈했다. 그 선을 따라 걸으면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집의 숨결을 읽는 법
첫 수업이 끝난 저녁, 반지하에 돌아오자 어머니가 국을 데우고 있었다. 김이 올라오는 냄비는 반지하의 냄새를 잠시 밀어냈다. “어땠어?” 성호가 묻자, 석민은 웃음만 지었다. 굳이 오래 설명하지 않아도 가족은 그 웃음의 의미를 읽었다. ‘들어갔다.’ 다은은 식탁에 반찬을 놓으며 갑자기 음성을 낮췄다. “그러면… 혹시 너 혼자만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석민은 대답 대신 작은 공책을 꺼냈다. 집 구조를 대략 그린 평면도. 현관—거실—주방—지하 스터디룸—안방—아이들 방—서재—정원. 어느 문이 자동으로 닫히고, 어느 문은 살짝 걸리적거렸는지. 로봇청소기가 자주 멈추는 카펫의 모서리는 어디였는지. 개가 좋아하는 소파의 위치, 향초가 켜지는 시간대, 바깥 조명의 타이머. 그는 집의 숨결을 기억하고 있었다. 숨결만 알면, 감기와 열도 예측할 수 있다.
성호는 오랫동안 말이 없더니 물었다. “너, 거기서 그냥 과외만 할 거냐?” ‘그냥’이라는 단어가 집 안의 공기를 살짝 흔들었다. 반지하에서 ‘그냥’은 감히 고를 수 없는 사치였다. 석민은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처음엔요. 그런데… 그 집은 인력 회전이 빠른 것 같아요. 가사 도우미, 운전기사, 정원 관리인. 다 용역 회사랑 계약이래요. 비가 많이 오면 택시가 잘 안 잡힌다고 차인정 씨가 말하더라고요. 운전기사가 갑자기 빠지면 대책이 필요하겠죠.”
어머니는 그의 눈빛에서 오래전 자신이 포기했던 ‘찬스’라는 단어를 보았다. 어머니는 한숨과 함께 식탁의 컵을 그에게 밀었다. “잘해. 다만 단단하게. 얇은 계단은 발을 잘못 디디면 부서져.”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집이 사람을 먹을 때가 있어. 큰 집들은 배가 커서, 한 번 삼키면 천천히 소화하지. 소화되는 동안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안에 들어온 줄 몰라.”
그 밤, 석민은 침대에 누워 휴대폰의 화면을 올렸다 내렸다. 지후와의 채팅창에 커서를 놓고, 몇 차례 썼다 지웠다. 결국 보낸 문장은 간단했다. “고마워. 덕분에 첫 수업 잘했어. 혹시… 너 거기서 과외하면서 본 거 있지? 집의 약점 같은 거.” 한참 뒤 지후가 답했다. “약점? 글쎄… 약점이라면, 윤 회장 집은 ‘빈틈’을 미학으로 믿더라. 문과 창 사이의 숨, 계단 틈의 그림자. 그 빈틈 속에 서 있으면, 누군가 널 보지 못할 때가 있어. 대신—너도 그들을 제대로 못 보게 돼.”
그 문장을 읽고 나니, 낮에 소연과 함께 썼던 세 줄 서사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그래도 물은 선명해서, 내가 어디 서 있는지 보였다.” 선명함은 때로 착각이었다.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손이 조금 떨렸다. 하지만 떨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다시 종이를 꺼내 사다리의 다음 칸을 그렸다—두 번째 자리. 집의 운전석.
다음 날, 그는 집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맞췄다. 창가에 앉아 커피잔에 맺힌 물방울을 훑으며, 유리 너머 골목을 지켜봤다. 예정보다 조금 이른 시간, 흰색 세단이 집 앞에 멈추더니 운전자가 내렸다. 중년의 남자, 수트와 구두, 깔끔하게 손질된 헤어. 남자는 하품을 한번 하고 스트레칭을 했다. 그리고 차문을 열어 조수석에 두었던 종이봉투를 꺼내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대로 들어갈 줄 알았던 봉투는 가장자리에서 걸려,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남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냥 들어갔다. 사소하지만 분명한 빈틈. 그 작은 장면은 석민의 머릿속에서 곧바로 서사를 낳았다. ‘깔끔함의 가면은, 귀찮음 앞에서 종종 벗겨진다.’
그는 휴대폰 메모장에 짧게 적었다. ‘운전기사—습관 체크. 쓰레기 처리—대충. 카시트—운전 후 바로 정리 안 함. 차량 내 방향제—강함(은하수 향).’ 다음 칸: ‘교체 가능성—높음. 사유—사소한 불성실.’ 이건 사람을 몰아내기 위한 계획서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저 빈자리가 생길 때, 내가 그 자리를 준비해 둔다.” 실은 말의 겉과 속은 같은 의미였다.
초인종을 누르기 전, 그는 거울 대신 휴대폰 카메라를 켰다. 표정, 시선, 말의 속도. 지후가 보내 준 조언을 떠올렸다. ‘너무 똑똑해 보이려 하지 마. 대신, 부탁을 잘 듣는 사람처럼 보여. 그 집이 원하는 건 ‘해결사’가 아니라 ‘안심’이야.’ 안심. 그는 그 말을 몇 번이나 입 안에서 굴렸다. 안심은 맛있는 부위였고, 동시에 가장 비싼 메뉴였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자, 차인정이 현관까지 배웅을 나왔다. “혹시, 다음 주에도 같은 시간 괜찮을까요? 그리고… 저희 집 일정이 조금 복잡해서, 혹시 일정 관리 같은 것도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소연 학원 픽업이라든지.”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물론 추가 비용은 드릴게요.”
그 질문은 허락이자 시험이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시간 조정 가능합니다. 픽업은 제가 면허가 있어서—필요하면 운전도 가능해요.” 이 말이 자신을 어디로 옮겨 놓을지 알면서도, 그는 한 박자 숨을 고르고 나서 덧붙였다. “차량 보험과 규정은 미리 확인할게요.” 안심의 언어였다.
집 밖으로 나왔을 때, 비는 그쳤고 도시는 막 저녁의 불을 켜기 시작했다. 언덕 아래에서 반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여전히 냄새가 났지만, 그 냄새 속에 섞인 희미한 백화점 향수의 잔향이 그에게 따라붙었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발걸음을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열여덟. 반지하의 문 앞에 도착해 잠시 멈췄다. 문 손잡이는 흔히 잡히는 만큼 손때가 묻어 있었고, 그 손때 사이로 새벽과 밤이 골고루 묻어 있었다.
방 안에 들어오자, 어머니가 물었다. “오늘은 냄새가 덜 나네.” 석민은 웃었다. “비가 그쳐서요.” 그리고 덧붙였다. “아니, 아마 내가 다른 냄새를 묻혀 왔나 봐요.” 그는 씻지도 않은 채 책상에 앉아 공책을 펼쳤다. 오늘 본 것들을 빠르게 적었다. 집의 조명 스위치 위치, 소연의 필기 습관, 차인정의 시선이 머무는 곳, 그리고 자신이 심어 둔 작은 ‘돌다리’들—주 2회 수업을 주 3회로 늘리는 문장, 픽업을 위한 면허, 일정 관리의 제안. 한 장, 또 한 장. 공책의 종이는 사다리의 널판처럼 쌓여 갔다.
밤이 완전히 내려왔을 때, 그는 불을 끄고 누웠다. 천장 대신 창틀에 비친 거리의 불빛이 은은하게 흔들렸다. 반지하의 천장은 늘 낮았지만, 그 낮음이 그를 짓누르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낮은 천장과 낮은 창이 그를 쏟아져 들어오는 바깥의 정보와 상향의 욕망에 더 가까이 붙게 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곧 소연의 수영장 물결과 집의 향, 계단의 돌기, 인터폰의 미세한 딜레이까지, 모든 디테일이 하나의 지형도로 변해 갔다. 그는 그 지형도를 따라, 내일의 발걸음을 배치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스스로에게 아주 단순한 질문을 던졌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대답은 쉽게 오지 않았다. 다만 그 질문이 그의 귓속에서 오래 머무는 동안, 반지하의 공기는 조금 덜 눅눅해졌다.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사다리는 아직 얇지만, 올라갈 발은 이미 신발끈을 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