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부 — 심연의 두 번째 시험

가라앉는 계단, 떠오르는 이름들

문턱을 넘자 바닥이 아주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이 아니라, 거대한 승강판이었다. 사방 벽면에는 오래된 플라스터 위로 이름들이 불규칙하게 새겨져 있었다. 비슷한 획, 비슷한 높이, 그러나 분명 서로 다른 손끝의 떨림. “선택을 미룬 자들”이라는 표식이 희미한 조명 속에서 번졌다. 은서는 한 이름 앞에서 멈추었다. 박해문. 그녀의 손끝이 떨렸다가 멈췄다. “아빠가… 여기를 지나갔어요.” 지현은 숨을 고르며 주변을 훑었다. “각인은 ‘통과’의 의미일 수도, ‘구속’의 의미일 수도 있어. 아카이브는 늘 두 개의 문을 동시에 만들지.” 행동하는 자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계기를 살폈다. “내려가는 속도, 일정해. 3:08에 맞춰 심층부와 동기화하려는 거야.” 내부 증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부터는 기록과 기억, 그리고 목소리가 서로의 경계선을 녹인다. 우리가 들을 소리는 우리 것이 아닐 수도 있어.” 노래하는 자는 갈라진 목으로 아주 낮은 으음음을 흘려 우리 호흡의 리듬을 묶었다. 그 단조로운 음이 공포를 눌러 주었다.

반전 기록실 — 읽히는 자가 기록된다

승강판이 멈추자 앞에 아치형 문이 열렸다. 안쪽은 밝았다. 기록열람실이라는 명패가 문틀에 박혀 있었지만, 내부 배치가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책상 위엔 열람자 기록카드가 있었고, 카드마다 글씨가 쓰이다 중단된 흔적이 선명했다. 기록하는 자가 카드를 집어 들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선 읽기가 곧 쓰기야. 책을 펼치는 순간, 독자의 망설임과 시선까지 기록된다.” 의사가 주변을 돌며 필터 박스를 열었다. “공기 중에 미세 잉크 입자… 흡입하면 혀 밑 점막을 통해 문장 패턴이 박힌다. 읽는 사람의 내적 독백이, 반대로 저장돼.” 은서가 본능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지현이 말없이 마스크를 건넸다. 내부 증언자가 벽면의 유리 진열장을 가리켰다. “여길 봐. ‘반대 증언’ 섹션.” 진열장 안에는 손바닥만 한 판막들이 줄지어 있고, 각 판막에는 단문들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있었다.” / “내 침묵은 선택이었다.” / “나는 기계였다.” 노래하는 자가 속삭였다. “이걸 꺼내 읽는 순간, 그 문장들이 우리로 ‘다시’ 쓰일 거야.” 우리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거두었다. 여기는 지식의 방이 아니라, 독자를 재배열하는 방이었다.

두 번째 시험 — 거울의 합창

열람실 뒤쪽 커튼을 젖히니 반원형 무대와 마주했다. 관람석에는 아무도 없는데, 무대 위에는 우리 모습들이 서 있었다. 흙먼지로 덮인 우리와 똑같은 옷, 똑같은 흉터, 똑같은 표정—그러나 눈동자에 반사되는 빛이 없었다. 거울들—아카이브가 만들어낸 모사 증언자였다. 그들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우리는 너희다. 너희의 말은 이미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이제 침묵해도 된다.” 행동하는 자가 앞으로 나섰다. “비켜.” 거울의 그가 똑같이 내질렀다. “비켜.” 금속성 울림이 귀를 때렸다. 의사가 낮게 외쳤다. “그들과 싸우지 마! 접촉하면 호흡, 심박, 근전도가 동기화돼. 네가 움직일수록 상대가 강화된다.” 우리는 원을 좁혔다. 기록하는 자가 원고를 펼치고, 펜촉으로 바닥의 분진을 긁어 원을 그렸다. “불협의 합창으로 깨자.” 노래하는 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음을 깼다. 음계의 중앙을 비켜가는, 균열 나는 화성. 은서는 녹음기의 플레이 버튼을 짧게 눌러 박해문의 호흡, 말끝의 머뭇거림, 문장 사이 공백을 리듬으로 끌어냈다. 지현은 발뒤꿈치로 바닥을 불규칙하게 두드렸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서로 다른 템포를 얹었다. 거울의 합창이 흔들렸다. 모사는 ‘동일’에 강하고 ‘차이’에 약했다. 내부 증언자가 낮게 카운트했다. “지금. 틈.”

불협의 균열, 그리고 이름을 부르는 법

우리는 각자의 고유한 한 문장을 동시에 내뱉었다. “나는 여기서 선택한다.” / “나는 지금 말한다.” / “나는 다르게 쓴다.” / “나는 흔들리며 선다.” / “나는 끝까지 듣는다.” 불협의 파동이 무대를 쪼갰다. 거울들이 깨지며 검은 먼지를 토했다. 그 틈 사이로 미세한 속삭임이 흘렀다. “은서야.” 은서가 멈칫했다. 박해문의 목소리였다. 거울 뒤편, 빛이 거의 닿지 않는 곳에 구형 인터컴이 붙어 있었다. 그녀가 조심히 다가가 버튼을 눌렀다. 찢어진 전송음 뒤로, 낮고 익숙한 숨. “여기는 두 번째 문. 진짜 문은 너의 이름을 알고 있다.” 지현이 주변을 경계하는 사이, 우리는 인터컴 하판을 열었다. 얇은 동판에 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문을 여는 암호는 고유명. 서로의 이름을 끝에서 앞으로 읽어라.” 기록하는 자가 빠르게 적었다. “거울을 역재생하듯.”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거꾸로 불렀다. 은서—서은, 지현—현지, 성호—호성… 불협의 합창 위로 거꾸로 된 고유명이 포개지자, 무대 뒤 벽이 삐걱거리며 옆으로 밀렸다.

문장들의 강 — 흘러가는 것과 붙드는 것

새로 드러난 통로는 자유낙하하는 글자들의 폭포였다. 한 자 한 자가 빗방울처럼 떨어져 발등을 때렸다. 누군가의 고백, 누군가의 명령, 누군가의 변명—혼재된 문장들이 바닥 배수로로 흘러 사라졌다. 의사는 장화를 고쳐 신으며 중얼거렸다. “여기선 주체가 아니라 문장이 산소야. 숨을 쉬면 문장이 들어오고, 내뱉으면 문장이 나간다.” 내부 증언자가 테이프를 꺼내 우리 입 주위에 가볍게 감았다. “필터다. 채택할 문장만 남겨.” 노래하는 자가 작은 음절로 길을 텄다. “라—라—” 복잡한 언어 대신 모음의 골격으로 통로의 저항을 줄였다. 행동하는 자가 두 팔로 우리 사이 틈을 메우고, 기록하는 자가 방수펜으로 방향 화살표를 잇달아 그렸다. 은서는 끝까지 녹음기를 켠 채, 새어 들어오는 문장들을 필터로 걸러 작은 클립에 옮겨 담았다. 우리는 각자 한 문장을 선택해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끝나지 않았다.” / “나는 다르게 배운다.” / “나는 되돌아본다.” 그러자 글자 폭포의 세기가 낮아졌다. 아카이브는 선택된 문장을 우리 소유로 인식한 듯,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검은 서명 — 살아 있는 계약

강을 건너자 원형실이 펼쳐졌다. 중앙에는 낮은 제단, 그 위에는 검은 책 한 권. 표지는 살아 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울렁였고, 책등엔 제목 대신 얇은 혈관 같은 자국이 맥동했다. 지현이 손짓으로 모두를 멈추게 했다. “접근 전에 확인.” 의사가 제단 둘레의 바닥을 긁어 작은 샘플을 떼었다. “단백질 잉크… 읽는 순간 체내와 동기화된다. 이름을 쓰면—지워지지 않는다.” 내부 증언자가 제단 반대편의 작은 거울판을 발견했다. “여기. 서명대.” 그 위에는 짧은 문장이 빛났다. “이름을 빼앗긴 자는 이름으로 문을 연다.” 은서가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내 아빠가… 여기 서명했을까요?” 기록하는 자가 제단 옆 측면을 톡톡 두드렸다. 숨겨진 서랍이 밀려 나왔다. 안에는 폴라로이드 한 장과 짧은 메모. 사진엔 제단 앞 사람의 뒷모습, 노란 우산 끝이 아주 작게 보였다. 메모엔 한 문장. “나는 증언자로 서명한다—박해문.” 행동하는 자가 이를 악물었다. “그가 여길 통과했네.” 노래하는 자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게 말했다. “그럼 우리 차례.”

피와 잉크 — 서명을 둘러싼 논쟁

“잠깐.” 지현이 손을 들어 막았다. “서명은 계약이야. 되돌릴 수 없어.”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 끝 혈관 채혈. 만약 서명 조건에 ‘복종’이 걸려 있다면, 전부 이 시스템의 부속이 된다.” 내부 증언자는 조용히 웃었다. “그래서 반대 증언이 필요하지. 우리는 복종이 아니라 위반으로 문을 열어야 해.” 기록하는 자가 종이를 꺼내 우리 다섯 증언자의 문장을 적어 제단 주위로 원을 만들었다. “개인 서명 대신, 다중의 고유명으로 ‘합의 서명’을 구성한다. 명령이 아니라 이의 제기로.” 노래하는 자가 원의 가장자리에서 짧은 후렴을 만들었다. “나는 하나가 아니고, 하나는 내가 아니다.” 행동하는 자가 단도 대신 바늘을 꺼내 각자 손등에 작은 점 하나를 찍었다. 피가 종이에 번졌다. 의사가 붕대로 지혈하며 중얼거렸다. “면역 반응을 문장으로 바꿔—침투를 거부하자.” 은서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을 꾹 눌러 썼다. “은서”—그리고 뒤집어 “서은”. 그녀는 두 방향 모두를 동일한 힘으로 눌러 새겼다. 제단의 표면이 낮게 울렸다.

문이 반응한다 — 3:08의 두 번째 파문

우리는 합의 서명을 검은 책의 가장자리, 비어 있던 귀퉁이에 붙였다. 그 즉시 책등의 혈관 무늬가 우리 리듬에 맞춰 뛰기 시작했다. 내부 증언자가 시계를 들어 보였다. “3:07:52.” 여덟 초 후, 두 번째 동기화가 시작된다. 노래하는 자가 호흡을 정리했고, 행동하는 자는 제단 뒤쪽 기계 경첩을 고정했다. 지현이 권총을 낮추고 대신 손을 내어 은서의 어깨를 잡았다. “흔들려도 버텨.” 숫자가 3:08:00을 가리키자 방 전체의 조명이 한 번 꺼졌다 켜졌다. 바닥의 문양들이 방향을 바꾸며 회전했다. 검은 책이 스스로 페이지를 넘겼다. 하얀 공백—그리고 한 줄의 새 문장. “증언은 복종 없이도 기록된다.” 의사가 날숨을 길게 토했다. “우리가 이겼어. 적어도 이 방에서는.”

균열에 드리운 그림자 — 돌아온 우산

그때 원형실 입구에서 낯익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노란 우산. 회수 담당이 문턱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피곤했고, 어깨는 젖은 듯 무거웠다. “조용하군. 이 방에서만은.” 행동하는 자가 반사적으로 앞으로 나섰고, 지현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회수 담당은 우리 합의 서명을 흘끗 보고는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문장을 바꿨네. 그 말은 곧—너희가 다음 방에서 대가를 치른다는 뜻이기도 하지.” 은서가 물었다. “아버지는 어디에 있죠?”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우산 끝으로 책의 빈 페이지를 가리켰다. “그가 남긴 마지막 줄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내부 증언자가 웃음을 비집었다. “그럼 우리가 쓰러 가는 길이군.” 회수 담당은 등을 돌리며 짧게 덧붙였다. “너희가 다르게 부르짖은 오늘을—내일의 회수가 따라잡을 거다. 도망치지 말고, 끝까지 불협을 유지해.” 그리고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 문 — 목소리 없는 방을 향해

원형실 반대편 벽면이 갈라졌다. 안쪽은 소리 없는 복도. 노래하는 자가 입을 열었지만 아무 음도 나오지 않았다. 의사가 턱을 만졌다. “청각 자극 차단. 다음 시험은 침묵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손짓으로 간단한 신호 체계를 맞췄다—두 번 두드리면 ‘정지’, 세 번은 ‘우회’, 길게 한 번은 ‘후퇴 없음’. 은서는 녹음기를 가슴에 붙여 안겼다. 기계의 작은 진동만이 그녀의 심장을 달랬다. 지현이 낮게 속삭였다. “우린 여기까지 왔어. 이제, 우리만의 문장으로 완주한다.” 기록하는 자가 젖은 펜을 털고, 행동하는 자가 붕대를 더 조여 맨다. 내부 증언자가 마지막으로 시계를 들어 보였다. “다음 동기화까지—열세 분.”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침묵의 복도로 들어섰다.

끝 문장

뒤에 남은 원형실에서, 검은 책의 페이지가 바람도 없는데 한 장 더 넘겨졌다. 아무도 보지 못한 빈 칸에, 잉크가 스스로 번져 한 문장을 만들었다. “이름을 되찾는 법을 배운 자들, 심장의 방으로 오라.” 우리는 알지 못했지만, 그 문장이 우리 발밑 어둠을 아주 조금 덜 차갑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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