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부 — 침묵의 복도
소리가 사라진 길
우리가 들어선 복도는 기묘했다. 발걸음을 옮겨도 발소리가 없었고, 손가락이 벽을 스치는데도 아무 울림이 없었다. 은서는 두려움에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공기 자체가 소리를 삼키는 듯했다. 지현이 미리 정해둔 신호를 꺼내 들었다. 두 번 두드리면 정지, 세 번은 우회, 한 번 길게는 후퇴 없음. 우리는 서로의 눈빛을 의지하며 무음 속을 걸어갔다.
복도의 벽은 하얀 대리석처럼 매끈했지만 자세히 보면 수많은 균열이 선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 균열 안에는 마치 잉크가 굳어 검은 실핏줄처럼 박혀 있었다. 행동하는 자가 손으로 그 금을 더듬자, 미세하게 떨림이 퍼졌다. 그러나 그 떨림마저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오직 몸으로만 느낄 수 있었다.
의사가 손바닥에 작은 손전등을 비추며 기록했다. “여긴 청각 차단만이 아니라, 증언의 원천을 고갈시키려는 장치야. 목소리 없는 자는 곧 자기 자신을 부정하게 되지.” 기록하는 자가 펜촉을 꾹 눌러 종이에 선을 그었다. 그 소리마저 나지 않았지만, 글씨가 남는다는 사실이 우리를 조금 안심시켰다.
보이지 않는 관객
복도는 끝없이 이어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바닥에 작은 원형 홈이 파여 있었다. 원 안에는 발자국처럼 보이는 흔적이 찍혀 있었고, 그 크기와 방향은 제각각이었다. 내부 증언자가 몸을 굽혀 살폈다. “이건 단순한 흔적이 아니야. 우리 이전에 통과한 자들이 남긴 ‘무음 발자국’이지.”
갑자기 등 뒤에서 기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소리는 없었지만, 확실히 누군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봤을 때, 복도의 끝자락에 수십 개의 의자가 줄지어 놓여 있었고, 그 위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의자 등받이에 희미하게 눌린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관객들이 거기 앉아 있는 것처럼. 은서가 손으로 녹음기를 움켜쥐었다. 기계는 침묵했지만, 빨간 불빛이 여전히 깜빡이며 살아 있었다. “이곳은… 우리가 공연하는 무대 같아요.”
지현이 손짓으로 침착하라고 알렸다.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복도의 벽면이 점차 투명해지며 우리 모습이 비쳤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그림자가 시간차를 두고 따라 움직였다. 우리가 멈추면, 그림자는 몇 초 뒤에야 멈췄다. 노래하는 자가 입술로 짧게 멜로디를 흉내내듯 움직였으나, 소리는 없고 그림자만이 그 행위를 모사했다.
침묵 속의 시험
우리가 복도의 중앙쯤 도달했을 때, 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제단처럼 솟아오른 원형 공간이 나타났고, 그 위엔 네 개의 돌기둥이 있었다. 기둥마다 낡은 종이 한 장씩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말하지 않고 증언하라”라는 문장이 여러 언어로 쓰여 있었다.
의사가 손짓으로 설명했다. “우리를 시험하는 거야. 소리 없는 공간에서 증언을 증명해야 한다는 뜻.” 기록하는 자는 종이를 꺼내 글을 적기 시작했다. 그러나 종이가 돌기둥에 가까워지자, 글자가 스스로 지워졌다. 은서가 깜짝 놀라 손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바닥에 검은 금이 퍼지더니, 우리 발밑에서 흐릿한 사람 형상이 솟아올랐다. 목소리는 없었지만, 입 모양으로 “거짓”이라는 단어를 반복했다. 행동하는 자가 앞을 막아서며 몸짓으로 외쳤다. “우린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그림자는 무표정하게 다가왔다.
내부 증언자가 작은 돌멩이를 꺼내 바닥에 ‘진실’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그제야 그림자의 발걸음이 멈췄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그림자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거짓”과 “침묵”의 입모양이 겹쳐졌다. 지현이 주먹을 움켜쥐며 신호를 보냈다. “각자 하나씩 증언을 새겨라.”
이름 없는 증언
우리는 돌기둥 주위를 빙 둘러섰다. 각자 종이에 단 한 문장씩 적어 붙였다. 의사는 “나는 환자를 버리지 않았다.” 기록하는 자는 “나는 거짓을 기록하지 않는다.” 노래하는 자는 “나는 침묵 속에서도 노래한다.” 행동하는 자는 “나는 상처를 통해 증언한다.” 은서는 떨리는 손으로 적었다.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끝까지 지킨다.”
기둥이 흔들리며, 붙여 둔 종이들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 빛은 소리를 대신하는 증언이 되어 그림자들을 밀어냈다. 입 모양으로 “거짓”을 외치던 형상들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한 형상이 은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입술은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박해문”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은서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녹음기를 높이 들어올렸다.
복도의 끝에서
시험이 끝나자, 복도는 다시 조용히 이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벽이 투명하게 비치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관객들도 사라져 있었다. 대신 먼 끝에서 부드러운 빛이 새어 나왔다. 우리는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지현은 은서 옆에 서서 손짓으로 물었다. “괜찮아?” 은서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는 없었지만, 그녀의 눈빛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우리는 침묵의 복도를 통과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각자 마음속에는 더 많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끝자락의 빛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문 위에 새겨진 한 줄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침묵은 진실을 막을 수 없다.” 우리는 문 앞에서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무 소리 없이, 동시에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