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부 — 첫 번째 증언자

폐허 속의 단서

카페 ‘발화’의 불빛이 사라지고, 우리는 다시 어둠 속 도시로 들어섰다. 파괴된 창문 너머로 바람이 불어오며 유리 파편이 덜컥거렸다. 은서는 여전히 녹음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지만, 그 속에는 더 이상 두려움만이 있지 않았다.

“아버지가 남긴 말, 기억하죠? 다섯 명의 증언자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성호는 공책을 꺼내 굵은 글씨로 적었다. “첫 번째 증언자 — 누구인가?” 지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박해문은 이 도시에서 혼자가 아니었어. 그와 같은 실험에 휘말렸던 이들이 반드시 있어. 그중 누군가는 살아서 남아 있을 거야.”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증언자를 찾으려면, 아버지가 남긴 또 다른 흔적을 따라야 해.” 은서는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잡음 끝에 다시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은 북쪽의 의사였다. 그는 기억을 지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우린 서로를 바라봤다. “의사?” 지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가 바로 첫 번째 증언자야.”

의사의 흔적

북쪽 역을 벗어나 오래된 병원 건물로 향했다. 도시는 비에 젖어 있었고, 네온사인의 불빛은 꺼져 있었다. 병원은 이미 폐허였다. 창문은 모두 판자로 막혀 있었고, 현관문은 녹슬어 삐걱거렸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서자, 썩은 냄새와 약품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벽에는 오래된 차트들이 흩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깨진 유리병이 널려 있었다. 성호는 벽에 붙은 낡은 포스터를 발견하고 읽었다. “기억 소거 연구 — 환영 강연.” 지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기억을 지우는 연구라니… 박해문이 말한 게 이거였군.”

은서는 벽에 손을 얹고 낮게 말했다. “아버지는 이 병원에서 뭘 봤던 걸까요.” 나는 눈을 좁히며 어두운 복도를 살폈다. “그 답을 찾아야 해. 증언자는 이 안에 있을지도 몰라.”

기억을 잃은 남자

2층 병실 문을 열자, 한 남자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는 초라한 환자복 차림이었고, 눈빛은 공허했다. 우리를 보자마자 그는 몸을 움찔했지만, 곧 다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현이 낮게 물었다. “당신이… 의사입니까?”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더 이상 의사가 아니오. 나는 잊어버린 사람일 뿐.”

은서가 다가갔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기억을 지우는 방법을 아는 의사가 있다고. 그게 당신 맞죠?” 남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증언자가 되어야 할 사람이오. 하지만 내 기억은 잘려나갔다. 나는 더 이상 온전하지 않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이 기억하는 건 무엇입니까?” 남자는 손을 떨며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다. 거기엔 ‘3:08 — 발화 이후’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성호는 메모하며 말했다. “그 역시 같은 시간을 알고 있어. 이건 우연이 아니야.” 지현은 차갑게 속삭였다. “그렇다면 그는 첫 번째 증언자다.”

설계자의 그림자

그러나 우리가 대화를 이어가기도 전에, 창문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그림자들이 병원을 포위하고 있었다. 소매 끝의 은색 문양이 번쩍였다. “설계자들이다!” 지현이 총을 꺼내며 외쳤다. 남자는 눈을 크게 뜨며 몸을 떨었다. “그들이… 나를 끝내러 왔다.”

나는 빠르게 말했다. “우린 당신을 보호하러 왔다. 당신은 증언자야. 당신의 목소리가 필요해.” 남자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남은 힘을 다해 말하겠소.”

총성이 병원 복도에 울려 퍼졌다. 우리는 남자를 감싸 안고 뒤쪽 비상계단으로 달렸다. 창문 너머로 비가 들이치며 바람이 몰아쳤다.

첫 번째 증언

옥상으로 올라간 우리는 철문을 걸어 잠그고, 한가운데서 숨을 고르며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기억을 지우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동시에, 기억을 심는 법도 알았다. 박해문은 그 사실을 알았고, 나에게 증언하라고 했다. 나는… 설계자들의 실험을 봤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람들을 세 그룹으로 나눴지. 피해자, 가해자, 증언자. 하지만 사실은 모두 같은 존재였어. 나 역시 그 중 하나였고, 결국 기억을 잃은 채 살아남았다.”

은서는 눈물을 글썽이며 속삭였다. “아버지는 왜 이런 일을 알리려 했을까요?” 남자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반복되는 한, 우린 모두 가면을 쓴 죄인일 뿐이라고.”

지현은 총을 들며 주위를 살폈다. “설계자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내려가야 해.” 성호는 공책에 굵게 적었다. “첫 번째 증언 확보.”

나는 남자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은 이제 증언자입니다. 그리고 우린 반드시 당신을 지켜낼 겁니다.”

새로운 결심

비바람이 옥상을 덮쳤다. 병원 아래에서는 여전히 설계자들의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우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은서는 녹음기를 켜고 아버지의 목소리를 다시 틀었다. “…첫 번째는 기억을 지운 자. 그는 진실을 숨겼지만, 동시에 드러낼 열쇠다.”

은서는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이제 아버지의 말이 이해돼요. 증언자는 단순한 생존자가 아니라, 열쇠를 가진 사람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네 아버지의 길을 따라야 할 때야. 두 번째 증언자를 찾으러 가자.”

지현은 담배를 꺼내려다 멈추고 말했다. “이건 아직 시작일 뿐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도 목소리를 가졌다. 그게 힘이 될 거다.”

성호는 공책을 덮으며 크게 적었다. “첫 번째 증언 확보 — 다음 목표: 두 번째 증언자.”

우린 병원 옥상에 서서 몰아치는 비를 맞았다. 설계자의 그림자는 여전히 사방을 감싸고 있었지만, 우리의 발걸음은 더 단단해졌다. “증언은 이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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