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부 — 목소리가 돌아오는 방
문턱에 선 숨
문이 열리자 바람도 없는 공간에서 얇은 공기의 물결이 우리 얼굴을 스쳤다. 방은 넓지 않았지만 층층이 포개진 아치가 깊이를 끝없이 늘려 보이게 했다. 천장에서 늘어진 오래된 스피커들은 전원이 빠진 채 입을 다물고 있었고, 바닥 중앙에는 둥근 원형 무대가 깔려 있었다. 무대 둘레엔 유리관이 사방향으로 뻗어 있었는데, 그 안을 흐르는 것은 전선도 물도 아닌, 잔잔한 잔향과도 같은 빛의 먼지였다. 침묵의 복도를 지나오며 메말랐던 귀가 순간 웅 하고 미세한 저음을 느꼈다.
지현이 손바닥으로 공기를 가르며 속삭였다. “여긴… 소리를 되돌리는 곳이야.” 아직 우리 목소리는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직전의 완전한 무음은 아니었다. 한 음절씩, 비늘처럼 떨어져 나가던 침묵이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는 느낌. 의사는 벽에 박힌 금속판의 주파수 눈금을 살피더니 턱짓했다. “청각 자극 복원… 단계적. 너무 빨리 말하면 역류가 일어나.” 기록하는 자가 목울대를 쓸며 작은 숨을 내뱉었다. 그 소리가 방 안에서 둥글게 퍼졌다. 은서는 녹음기를 가슴에 꼭 붙였다. 빨간 표시등이 규칙적으로 깜박이고, 아주 낮게 기계의 심장 같은 맥박이 전해졌다.
반향 기계와 이름의 위치
무대 위에 난간만한 높이의 기계가 놓여 있었다. 표면엔 스크래치와 각인, 그리고 낡은 라벨: REV-CHAMBER / 인가 없는 재생 금지. 내부 증언자가 어깨를 기울여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원통형 공명관이 세 겹으로 겹쳐져 있고, 중앙 링에는 작게 각인된 좌표가 줄지어 있었다. “PLATFORM 3 / 08 / H-308 / 발화 / 메아리 방 / 검은 서명”—우리가 지나온 문장들의 목록. 행동하는 자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우릴 위해 설계됐다는 듯… 아니, 우릴 다시 설계하려는 장치야.”
그때 무대 아래쪽에서 푸른 불빛이 켜졌다. 바닥의 원형 홈이 돌면서 우리 발 위치를 규정하려 들었다. “서 있지 말고 서게 하려는군.” 지현이 반원을 그리며 우리를 재배치했다. “원에 매이지 마. 어긋남을 유지해.”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가 겹치지 않게 비스듬히 흩어져 섰다. 그 순간 공명관이 깜박이며 첫 번째 음절을 토했다.
“은—”
은서가 흠칫했다. 자신의 이름의 앞 음절이 방 안에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또렷한 끝 음절이 반대편에서 되돌아왔다. “—서.”
의사가 손가락 두 개를 세웠다. “분할 재생. 앞과 뒤를 떼어 서로 충돌시켜 이름의 정체성을 흔든다.” 내부 증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단계는 조합 오류. 이 방은 ‘고유명’을 해체해 반복 가능한 코드로 환원시키고 싶어 해.”
박해문의 음성, 그리고 덫
공명관의 톤이 바뀌더니, 익숙한 숨이 스피커의 먼지를 흔들었다. “은서야.”—박해문의 목소리였다. 너무 생생해서, 은서는 거의 본능처럼 무대 쪽으로 한 발 나아갔다. 나는 재빨리 팔로 막았다. “기다려.”
뒤이어 들린 말은 우리가 잘 아는 그가 아니었다. “돌아가라, 너의 증언은 충분하지 않다.” 한 박자 늦게, 같은 음색으로 겹쳐진 다른 구절. “선택은 착각이다. 어쩔 수 없다.” 목소리는 분명했지만 문장이 달랐다. 기록하는 자가 떨리는 펜끝으로 기계의 리듬을 적었다. “ 샘플, 절삭, 배열—그의 음성으로 반증언을 만든다.”
노래하는 자가 입술을 깨물고 작은 음을 냈다. 아직 온전하진 않았지만, 방은 그 소리를 따라 반응했다. 낮은 미로처럼 얽힌 반향이 찌그러진 음절들을 감싸며 모서리를 둥글게 했다. 의사가 고개를 들었다. “이 방의 규칙을 쥐려면, 목소리를 다시 배우는 수밖에 없어.” 지현이 은서에게 속삭였다. “너부터.”
목소리를 되찾는 훈련
우리는 무대 가장자리에 반원으로 섰다. 각자의 호흡을 서로 맞추기보다 일부러 엇박으로 분배했다. 침묵의 복도에서 배운 것—동일함은 적에게 유리하고, 차이는 우리에게 유리하다. 은서는 가슴의 리듬을 천천히 세며 첫 음절을 꺼냈다. “나.” 방은 즉각 반사했다. “—나 / —나 / —나” 동그랗게 굴러다니는 반사가 네다섯 개로 분열되었다. 기록하는 자가 손짓했다. “쫓아가지 말고, 앞질러.”
은서는 두 번째 음절을 올렸다. “는.” 그 사이 노래하는 자가 “라”를 얹어 공명관의 중역대를 포화시켰다. 행동하는 자는 발뒤꿈치로 바닥을 불규칙하게 두드려 반사의 타이밍을 어긋나게 했다. 나는 방 가장자리 콘솔의 수동 다이얼을 돌려 잔향 시간을 0.7초에서 0.5초로 낮췄다. 진동이 한 번 휘청하고, 왜곡된 아버지의 목소리가 뒤로 미끄러졌다.
의사가 간결하게 지시했다. “문장을 짧게, 단단하게. 의미보다 호흡의 윤곽을 먼저.” 우리는 단어를 잘라 음절의 점으로 만들고, 그 점들을 엇갈리는 선으로 엮었다. 공명관의 파형이 조금씩 바뀌며, ‘어쩔 수 없다’로 수렴하던 자동완성이 늪처럼 느려졌다.
반향의 반격과 이름의 중심
그때 방 중앙에서 날카로운 삐— 소리가 스치듯 지나갔다. 반향 기계가 스스로 출력 레벨을 올렸다. 우리 목소리를 흡수해 더 큰 벽으로 되돌려 보내는 역합창의 시작이었다. 천장의 스피커들이 동시에 열리며, 우리의 음절을 서로 뒤바꾸어 뿌렸다. 은서의 “나”는 내 “여기”에 붙고, 노래하는 자의 “라”는 지현의 “선택” 꼬리에 달려 괴상한 문장으로 굳어졌다. “여기—라—선택—나.” 방이 우리를 비웃듯 한 문장으로 합쳐지려 했다.
내부 증언자가 소매에서 얇은 금속 핀을 꺼내 무대 원주에 표시된 작은 홈을 하나하나 눌렀다. “고유명의 중심을 다시 찍어.” 의사가 즉시 손가락으로 자신의 심장 위치를 두 번 두드렸다. 우리는 동시에 이름을 불렀다. 남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정식으로, 또렷하게.
“은서.” / “지현.” / “성호.” / “해문.”—그리고 노래하는 자가 자신의 잊힌 이름을 더듬으며 꺼냈다.
이름이 방을 가르는 순간, 역합창의 거대한 막이 세로로 찢겼다. 분해되어 섞이던 음절들이 제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공명관의 링 위 좌표가 한 칸씩 뒤로 촉촉하게 움직였다. 기록하는 자가 미소를 머금었다. “이 방의 언어는 관계가 아니라 주체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두머리의 방송, 보이는 손
잠시 고요. 그때 벽면의 검은 유리창이 켜지며, 우두머리의 상반신이 나타났다. 실시간이 아니라 삽입방송이었다. 그는 노란 우산도, 무한대 핀도 달지 않았다. 단정한 회색 셔츠, 고요한 눈. “축하한다.” 화면 속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너희는 목소리를 되찾는 법을 배웠다. 그러니 이제—너희 말에 책임을 져라.”
그의 손이 테이블에서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검은 카드 키. <REV-CHAMBER : 관리자 모드>라는 문구가 잠깐 빛났다. “이 장치는 너희에게 선물로 주지. 그 대신, 오늘 여기서 나온 말은 다시는 취소되지 않는다.” 화면이 ‘찌익’ 소리를 내며 꺼졌다.
지현이 이를 악물었다. “책임을 빌미로 취소 불가를 강요하겠다는 거네.” 의사가 고개를 저었다. “책임은 맞아. 다만 그들의 책임은 봉쇄고, 우리의 책임은 돌아봄이야.”
합창의 문장, 취소 불가 선언의 전복
우리는 무대 중앙을 비웠다. 그 자리에 은서가 한 걸음 들어섰다. 그녀는 박해문의 왜곡 음성이 남긴 상흔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한 글자씩, 마치 종이에 새기듯 말했다. “나는—어쩔 수 없다는 말을—오늘—여기서—반납한다.”
그 문장이 방에 고정되자, 반향 기계가 자동으로 매크로를 돌렸다. <불변 선언>—그러나 우리는 이미 대비를 해 두었다. 기록하는 자가 제본끈 같은 얇은 케이블을 콘솔 측면 포트에 꽂고, 합의 서명에서 배운 다중 서명 방식을 복제했다. “개인의 불변 선언을 공유 선언으로 바꿔.” 내부 증언자가 이름을 한 번 더 불렀고, 행동하는 자가 발뒤꿈치 리듬으로 타임코드를 어긋나게 쪼갰다. 노래하는 자는 짧은 후렴을 올렸다. “나는 하나가 아니고, 하나는 내가 아니다.”
기계의 로그가 초록으로 번쩍였다. <취소 불가>는 <집단적 갱신>으로 치환되었고, 선언은 봉인되지 않고 계속 수정 가능한 약속이 되었다. 지현이 숨을 내쉬며 말했다. “책임은 고정이 아니라 갱신이야.”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 있는 몸처럼.”
박해문의 진짜 말
공명관이 마지막으로 저음을 울렸다. 스피커 하나가 불꽃을 튀기더니, 잡음 속에서 다른 음성이 떠올랐다. 이번엔 왜곡이 거의 없었다. 시간의 먼지가 낀, 그러나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신규 세그먼트.
“은서야, 만약 네가 이 방에선 목소리를 되찾는다면, 다음 방에서—너는 내 침묵을 듣게 될 거다. 내가 말하지 않은 말들이, 내가 끝내 삼킨 호흡이, 네 곁에 앉아 있을 거다. 그때도 너는 네 이름을 먼저 불러라. 그다음에 내 이름을 불러라. 그래야 너의 증언이 내 증언을 삼키지 않는다.”
은서의 눈이 젖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 대신 짧고 또렷하게 말했다. “알겠어요, 아버지.” 방은 그 말만을 조용히 되돌려 주었다. “알겠어요.”—그 이상도 이하도 없이.
회수 담당의 그림자와 작은 예고
문틀 그림자에 노란 곡선이 스쳤다. 회수 담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우산을 접어 왼손에 걸고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피곤했지만 어딘가 안도한 듯한 그늘이 지나갔다. “목소리를 되찾았군.” 그는 무대 가장자리의 홈을 발끝으로 눌렀다. 반향 기계가 전원을 낮추며 웅음을 수그러뜨렸다.
“다음은 눈먼 방이다. 네 목소리가 돌아온 대신, 시야가 빼앗길 거야. 균형을 잃지 마.” 그가 등을 돌며 덧붙였다. “그리고—‘누가 처음 말을 시작했는가’를 꼭 기억해.”
나는 그가 사라지는 방향을 잠시 바라보다가 팀을 보았다.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현은 총을 닦아 장전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의사는 붕대를 새로 갈아매며 손가락 감각을 되살렸다. 기록하는 자는 이제 막 말로 바뀐 것을 다시 글로 옮겼고, 노래하는 자는 입술을 달구며 다음 방의 침묵에 대비해 음을 정리했다. 은서는 녹음기를 껴안고 한 번 더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출구, 그리고 작은 합창
방의 서쪽 벽이 미끄러지며 열린다. 어둠이 아니라, 희끄무레한 안개가 흘러들었다. 발을 들여놓자마자 시야의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흐려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려움이 덜했다. 목소리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 “은서, 지현, 성호, 해문…” 그리고 노래하는 자가 자신의 이름을 완성했다. 방금까지는 목구멍에서 걸린 듯 나오지 않던 그 이름이, 안개 속에서 또렷이 맺혔다.
그 순간, 저 멀리서 미세한 대답이 들렸다. 우리가 부른 이름들이,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의 입술에서 되돌아왔다. 도시의 어딘가, 아카이브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우리의 합창을 이어받는 듯했다. 우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다음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이 닫히기 직전, 반향 기계의 작은 패널이 홀로 켜졌다가 꺼졌다. <로그 저장: ‘취소 불가’ → ‘집단 갱신’ 전환 성공>. 그리고 가장 아래 줄—작은 글씨로 한 문장. “목소리는 설계될 수 있으나, 합창은 설계될 수 없다.”
작은 뒤돌아봄
안개가 무릎까지 차오를 즈음, 지현이 조용히 말했다. “처음에 우리가 배운 건 도망이었다. 그다음엔 뒤돌아보는 법. 이제는—다시 말하는 법이군.” 의사가 웃었다. “다음 방에선 다시 듣는 법을 잃겠지. 잃고, 배우고, 또 잃고.” 기록하는 자가 덧붙였다. “그래도 글씨는 남는다.” 행동하는 자가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발자국도.”
은서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아버지, 전 제 이름을 먼저 부를게요. 그다음에, 당신 이름을 부를게요.” 안개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우리 모두의 얼굴이 흐려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각자의 목소리는 더 선명해졌다. 우리는 그렇게 눈먼 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