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부 — 새벽의 균열
도시 위로 떠오른 새벽
터널을 빠져나오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빗줄기는 잦아들었지만, 도시는 여전히 젖어 있었다. 가로등 불빛은 희미하게 깜빡였고, 도로 위에는 물웅덩이가 거울처럼 반사되어 있었다.
은서는 무릎을 꿇고 숨을 고르며 속삭였다. “살았다… 드디어 살아남았어요.”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우린 단지 한 막을 넘겼을 뿐이야.”
멀리서 시계탑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벽 네 시. 그러나 우리에게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숫자가 아니었다. 3시 8분이라는 숫자가 계속해서 귓가를 울렸다. 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아빠는… 정말 아직 살아 있을까요?” 나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잖아. 살아있든, 남겨진 기록이든… 어쨌든 그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어.”
폐허가 된 광장
우린 도심의 오래된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때 시민들의 집회 장소였던 이곳은 이제 낡은 벽보와 부서진 벤치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광장은 기묘하게도 비어 있지 않았다.
검은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원형으로 서 있었다. 모두의 소매 끝에는 은색 ∞ 핀이 달려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는 높은 단상이 있었고, 거기에는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다른 추적자들과 달리 얼굴을 가리지 않았고, 목소리는 또렷했다.
“…선택은 없다. 그러나 목소리는 남는다. 우리는 증거를 지배하고, 기억을 지배한다.”
은서가 내 옆에서 몸을 움츠렸다. “그들이예요… 설계자의 중심부.” 나는 숨을 고르며 속삭였다. “맞아. 이제 우린 무대 한가운데로 들어온 거야.”
첫 정면 대치
단상 위의 남자가 우리를 발견하자 미소를 지었다. “아, 드디어 나타났군. 박해문의 딸, 그리고 그의 동반자.” 그의 목소리는 군중을 휘감으며 퍼졌다.
“네 아버지는 우리 중 하나였지. 하지만 동시에 배신자이기도 했다. 그는 기록을 남겼고, 그것이 지금 너희 손에 있다. 넘겨라. 그렇지 않으면, 네가 아버지를 다시 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은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녹음기를 꼭 쥐며 속삭였다. “선생님… 어떻게 해야 하죠?” 나는 그녀의 손을 감싸며 낮게 대답했다. “우린 협상하러 온 게 아니야. 진실을 지키러 온 거야.”
나는 군중을 향해 소리쳤다. “진실은 당신들의 소유가 아니야!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고, 선택을 빼앗아도… 증언은 살아남는다!”
군중은 술렁거렸다. 단상 위의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순간, 원형으로 서 있던 추적자들이 일제히 우리 쪽으로 움직였다.
광장의 격돌
설계자들의 추적자들이 몰려왔다. 나는 급히 광장의 중앙으로 몸을 던지며 은서를 보호했다. 그녀는 서류 가방을 품에 안고 있었다.
첫 번째 사내가 주먹을 휘둘렀다. 나는 그의 팔을 붙잡아 뒤로 꺾어넘겼다. 그러나 곧 두 번째 사내가 뒤에서 달려들어 나를 밀쳤다. 차가운 돌바닥에 등이 부딪히며 숨이 막혔다.
은서가 비명을 지르며 녹음기를 높이 들었다. “이걸 원한다면, 나를 먼저 쓰러뜨려야 해요!”
그 순간, 군중 속에서 몇몇의 얼굴이 흔들렸다. 그들도 두려워하는 듯했다. 아마 그들 역시 설계자들의 강제 속에서 끌려온 자들이었을지도 몰랐다.
나는 이를 악물며 일어나 다시 싸웠다. 금속 파이프를 휘둘러 공격을 막아내고, 은서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추적자들의 숫자는 압도적이었다.
뜻밖의 동맹
그때, 군중 속에서 낯선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얼굴은 지쳐 있었지만, 눈빛은 단호했다. “멈춰! 그들에게 손대지 마.”
단상 위의 남자가 비웃으며 물었다. “넌 누구지?” 여자는 주머니에서 작은 테이프를 꺼내 흔들었다. “나는 한때 너희와 함께했던 자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박해문이 남긴 진실은 내가 지켜왔다.”
은서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빠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에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아버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살아 있고, 너희를 기다린다.”
군중이 다시 술렁였다. 단상 위의 남자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손을 내리쳤다. “잡아라! 반역자까지 함께!”
순간 광장은 혼란에 빠졌다. 추적자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일부 군중은 망설이며 길을 비켜 주었다.
나는 여자의 손을 잡고 은서를 끌었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새벽의 균열
우린 광장의 좁은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뒤에서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내 이름은 지현. 네 아버지와 함께 연구했어. 그는 배신자가 아니야. 그는 증언자였어. 그리고… 그는 아직 살아 있다.”
은서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빠가… 정말 살아 있어요?” 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그를 구하려면, 너희가 가진 기록을 완성해야 해. 지금까지 모은 조각만으로는 부족해. 마지막 열쇠가 필요해.”
나는 숨을 고르며 물었다. “마지막 열쇠가 뭐지?” 지현은 차갑게 대답했다. “…308. 그 시간의 진짜 의미를 알아내는 거야.”
멀리서 다시 종소리가 울렸다. 새벽 다섯 시. 그러나 도시의 공기는 더욱 불안정해졌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도망자가 아니었다. 진실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딘 증언자들이었다.
새벽의 균열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균열은 곧 도시 전체를 뒤흔들 폭풍으로 번져나갈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