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부 — 눈부신 어둠의 방

빛의 과잉

28부에서 청각을 잃고 겨우 손글씨로 증언을 이어간 끝에 우리는 문을 통과했다. 그러나 29부의 시작은 정반대였다. 이번엔 침묵 대신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처음엔 해돋이처럼 찬란했으나 곧 우리 시야는 새하얀 막으로 뒤덮였다. 눈꺼풀을 감아도 소용없었다. 과잉된 빛은 어둠과 다를 바 없었다.

의사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입모양만으로 말했다. ‘이건 눈을 빼앗는 방식이야. 빛이 너무 많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만들지.’ 은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받았다.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끔찍해요. 지금은… 가짜가 다 진짜처럼 보여요.”

우린 손을 맞잡았지만, 이번엔 감각조차 왜곡됐다. 서로의 손등에 문자를 새기려 했으나, 눈부심 속에 손가락이 여러 개로 겹쳐 보였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방은 과잉된 진실과 거짓을 뒤섞어 우릴 혼란에 빠뜨렸다.

빛으로 쓰여진 거짓

앞을 더듬다 우리는 거대한 벽을 만났다. 그 위에는 수많은 문장이 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우린 실패했다.” “네 목소리는 쓸모없다.” “너희의 이름은 지워졌다.”

모두 빛으로만 새겨진 문장이었다. 너무 눈부셔서 눈을 돌릴 수도 없었다. 지현이 이를 악물며 손바닥에 글자를 새겼다. ‘저건 가짜야. 진짜 기록은 빛에 새겨지지 않아. 몸과 목소리에 남는 거야.’

기록하는 자가 허공에 종이를 꺼내 글씨를 남기려 했으나, 종이는 금세 빛에 녹아 사라졌다. 은서가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우린 빛을 거부해야 해. 보이지 않아야 진짜를 붙잡을 수 있어.”

자발적 눈먼 자

행동하는 자가 재빨리 옷자락을 찢어 눈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는 눈가리개를 만들어 우리 모두의 얼굴에 씌웠다. 처음엔 공포스러웠다. 빛이 사라지고, 세상은 다시 칠흑처럼 변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오히려 안정을 되찾았다.

의사가 손끝으로 글씨를 새겼다. ‘자발적으로 눈을 가려야 진짜가 보인다.’ 이 문장은 우리 모두의 심장에 새겨졌다. 우리는 다시 한 줄로 서서, 어둠 속에서 서로의 손길로 방향을 찾았다.

그러나 방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곧 눈가리개 안쪽에서조차 환영이 떠올랐다. 눈을 감았는데도, 우리 앞엔 박해문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피로 얼룩진 손으로 은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넌 내 증언을 배신했다.”

은서가 눈을 감은 채 눈물만 흘렸다. 하지만 행동하는 자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글씨를 새겼다. ‘가짜는 빛으로만 존재한다. 진짜는 네 안에 있다.’ 은서는 눈물 사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의 함정

앞을 더듬어 나가던 우리는 거대한 거울 벽 앞에 다다랐다. 눈가리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울 속에선 우리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눈으로 본 게 아니라, 빛으로 조작된 환영이었다.

거울 속의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넌 이미 패배했어. 너희의 기록은 설계자의 것이야.”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나는 아직 증언한다.’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그 글씨를 따라 하며 비웃었다. 지현이 침착하게 말했다. ‘거울은 되비추지만, 따라올 뿐이다. 진짜는 새로 쓰는 자야.’

우리는 동시에 거울에 손을 얹고 새로운 문장을 새겼다. “우린 패배하지 않았다. 우린 증언한다. 우린 이름을 지킨다.” 그 순간 거울은 산산이 부서졌다. 빛의 조작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출구와 경고

거울 뒤에는 어둡지만 안정적인 통로가 있었다. 빛이 줄어들자, 우리의 눈은 조금씩 기능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제는 알았다. 눈으로 보는 것이 진실이 아님을.

출구 위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눈부심은 어둠이다. 눈을 가려야 길이 보인다.”

우리가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등 뒤에서 다시 글씨가 새겨졌다. “마지막은 네 심장이다. 네 심장을 열어야 증언은 완성된다.”

29부는 이렇게 끝났다. 눈을 가림으로써 진실을 얻었지만, 다음은 더 가혹했다. 이제는 감각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심장이 시험대 위에 오르게 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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