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부 — 도망자의 도시
어둠 속으로 들어온 불빛
계단을 오르자 눈앞에 펼쳐진 건 낯설지만 익숙한 도시의 밤 풍경이었다. 빗줄기가 아스팔트 위로 쏟아지고, 네온사인 간판들이 번쩍였지만, 그 모든 게 비에 젖어 흐릿하게 일렁였다. 숨이 차올라 가슴이 터질 듯했지만, 은서와 나는 멈추지 못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는 여전히 또렷했고, 검은 세단의 헤드라이트는 빗속에서도 우리를 쫓아왔다.
은서가 헐떡이며 속삭였다. “그들이 벌써 따라왔어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사람 많은 곳으로 가야 해. 인파 속에 숨어야 살아남을 수 있어.”
우린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번화가로 들어섰다. 비에 젖은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고, 차도에는 택시와 버스가 뒤엉켜 있었다. 이곳은 더 이상 지하가 아니었다. 하지만 설계자들의 눈은 어디에든 있었다.
나는 은서의 손을 잡으며 낮게 속삭였다. “도시는 우리를 감출 수도 있고, 더 쉽게 드러낼 수도 있어.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관건이야.”
군중 속의 추적
우린 번화가 한복판을 걸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휴대폰을 보며 지나갔고, 커피숍 앞에서는 손님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러나 내 눈은 한 곳에 꽂혔다. 인파 속에서 똑같은 검은 코트를 입고, 은색 ∞ 핀을 단 사람들이 서너 명 눈에 띄었다. 그들은 분명 우리를 향해 천천히 좁혀 오고 있었다.
“선생님…” 은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그녀를 지하철역 입구 쪽으로 이끌었다. “사람 많은 곳으로 들어가자. 거기서 흩어지면 우리가 유리해.”
지하철역 안은 빗물에 젖은 인파로 붐볐다. 사람들은 우산을 접고 개찰구를 지나가느라 바빴다. 우리는 군중 속에 섞여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는 여전히 집요했다. 설계자들의 눈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었다.
개찰구를 넘어서 계단을 내려가자, 갑자기 역 내부 방송이 울려 퍼졌다. “승객 여러분, 현재 3시 8분을 기점으로 열차 운행이 지연됩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은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3시 8분… 또 그 시간이에요.” 나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까지도 그들의 손아귀라는 거지.”
은밀한 목소리
우린 플랫폼 끝으로 달렸다. 열차는 오지 않았고, 사람들은 불평을 늘어놓으며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내 휴대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망설임 끝에 전화를 받자, 낯익지만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가 찾는 진실, 그것은 기록에만 있지 않다.” 나는 목을 움켜쥐며 물었다. “누구지? 설계자인가?” “아니. 난 내부에서 빠져나온 자다. 박해문을 알지? 그는 아직 살아 있다.”
은서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목소리를 누르며 속삭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는 사라졌다고 했잖아.” 상대방은 낮게 웃었다. “…사라진 게 아니라, 감춰진 거다. 3시 8분. 그 시간은 단순한 실험의 흔적이 아니다. 그건 약속이자, 신호다.”
통화는 갑자기 끊겼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박해문… 그는 아직 어딘가에 있다.”
추적자와의 충돌
그때였다. 군중 속에서 한 사내가 튀어나왔다. 그는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고, 눈빛은 매섭게 번뜩였다. 손에는 짧은 칼이 쥐어져 있었다.
“넘겨라. 녹음기와 서류. 그것이 네 생명을 대신할 것이다.”
나는 은서를 뒤로 밀치며 주위를 둘러봤다. 군중은 놀라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하지만 이곳은 이미 설계자들의 무대였다. 경찰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책가방에서 금속 파이프를 꺼내 들었다. 도서관에서 가져온 오래된 부품이었지만, 지금은 유일한 무기였다.
사내가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나는 파이프로 그를 막아냈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가 퍼졌다. 은서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지만, 그녀의 눈빛은 두려움 속에서도 굳세게 빛났다.
“선생님, 조심해요!” 나는 이를 악물며 사내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다시 주먹을 휘둘렀고, 내 턱에 강한 충격이 들어왔다.
순간, 은서가 녹음기를 꺼내 높이 들어올렸다. “이게 필요하다면… 우릴 먼저 쓰러뜨려야 할 거예요!” 사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다시 다가왔다.
그때, 플랫폼 반대편에서 또 다른 검은 코트들이 나타났다. 우린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선택의 순간
나는 은서의 손을 잡고 낮게 속삭였다. “지금 선택해야 해. 싸울지, 아니면 던질지.” 은서는 눈을 굳게 감았다가 뜨며 대답했다. “아빠가 남긴 기록이에요. 이건 절대 버리면 안 돼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끝까지 지켜내자.”
우린 동시에 반대편 선로로 뛰어내렸다. 사람들의 비명이 뒤를 따랐다. 설계자들의 추적자들도 따라오려 했지만, 갑자기 어두운 터널에서 강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지연되었던 열차가 마침내 들어오고 있었다.
우린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오기 직전, 어둠 속 터널로 몸을 던졌다. 굉음과 함께 열차가 스쳐 지나갔고, 추적자들의 모습은 일순간 사라졌다.
은서는 내 품에 안겨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살았… 살았어요.” 나는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낮게 말했다. “아니, 아직 살아남은 것뿐이야. 진짜 싸움은 이제 시작이야.”
터널 속은 어두웠지만,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빛은 새로운 무대, 더 깊은 진실로 우리를 이끌고 있었다.
도망자의 도시는 우리를 잠시 감췄지만, 동시에 더 큰 폭풍으로 내몰았다. 이제,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