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부 — 터널 속의 메아리
어둠의 심장부
터널은 상상보다 길고 깊었다. 열차의 굉음이 지나간 뒤에도 귀가 멍멍했고, 숨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벽에는 수십 년 된 낙서와 기호가 남아 있었는데, 대부분은 누군가 급히 남긴 듯 불안정한 필체였다.
은서는 손전등을 켰지만, 좁은 빛줄기만이 앞길을 비췄다. 그 빛은 어둠 속에 갇힌 먼지와 습기를 드러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설계자들이 여기도 알고 있을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시의 어둠은 전부 그들의 무대야. 우리가 숨는다고 해도 결국은 같은 연극 안에 있는 거지.”
그러나 나는 동시에 깨닫고 있었다. 이 터널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었다. 박해문이 남긴 또 다른 흔적이 분명히 여기 있을 터였다.
낡은 벽의 기호
한참을 걸어가자 벽에 이상한 표시가 나타났다. 분필과 페인트가 섞인 듯한 기호였다. 세모 안에 숫자 308이 적혀 있었고, 그 옆에는 희미한 글자가 보였다.
“기억은 지워져도, 목소리는 남는다.”
은서가 눈을 크게 떴다. “아빠가 늘 말하던 문장이에요. 그는 항상 목소리를 기록하는 게 가장 확실하다고 했어요.” 나는 벽을 손끝으로 짚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여긴 단순한 터널이 아니야. 녹음실… 아니, 실험실이었던 거야.”
우린 더욱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바닥에는 오래된 카세트테이프 껍질들이 흩어져 있었고, 일부는 아직도 테이프가 감긴 채 남아 있었다. 은서는 하나를 주워 귀에 대고 흔들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단호해졌다. “여기 어딘가에… 아빠 목소리가 있어요.”
설계자의 손길
터널 안쪽에서 낯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지직거리는 라디오 잡음이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어둠 속에서 검은 코트를 입은 두 명의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 역시 은색 ∞ 핀을 달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라디오를 돌리자,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3시 8분, 다시 시작된다. 실험은 중단되지 않는다.”
은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선생님… 그건 아빠예요. 분명히 아빠 목소리예요.” 나는 숨을 죽이며 속삭였다. “그렇다면 그는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들도 그걸 이용하고 있어.”
사내들은 잠시 멈춰 서서 벽에 남은 기호를 살폈다. 그중 한 명이 낮게 말했다. “박해문은 아직 우리 편일지도 모른다. 그가 남긴 건 흔적이 아니라, 길잡이다.”
다른 사내가 대꾸했다. “아니, 배신자야. 그렇기에 우린 그를 찾고, 끝내야 한다.”
그들의 대화가 끝나자, 나는 은서를 붙잡고 조용히 다른 쪽 갈래길로 몸을 숨겼다.
메아리의 방
우리가 들어선 갈래길은 작은 공간으로 이어졌다. 방은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천장에는 낡은 스피커가 매달려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희미하게 잡음과 함께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택은 없다. 하지만 증언은 남는다. 박해문, 기록한다.”
은서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빠예요… 그는 여기서 실험을 당한 게 아니라, 스스로 기록을 남기고 있었어요.” 나는 녹음기를 꺼내 스피커 앞에 두었다. 잡음과 목소리를 함께 기록했다. 그것이 우리에게 유일한 무기였다.
그러나 목소리가 이어진 순간, 방 안의 불빛이 깜빡였다. 누군가 이 시스템을 원격으로 작동시키고 있다는 뜻이었다. 은서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우릴 알아챈 거예요.”
나는 서둘러 스피커를 부숴 전원을 끊었다. 그러나 늦었다. 터널 안쪽에서 다시 발자국 소리가 몰려오고 있었다.
추적자와의 도주
우린 방을 빠져나와 다시 어둠 속 터널로 달렸다. 발밑에 튀는 물소리와 함께 심장이 쿵쾅거렸다.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도 점점 가까워졌다.
은서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선생님…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만 다녀야 해요?” 나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우린 도망치는 게 아니야. 아직 준비가 안 된 거야. 증거를 세상에 내놓을 순간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해.”
멀리서 빛이 보였다. 터널 출구였다. 우린 마지막 힘을 짜내 달렸다. 뒤에서는 설계자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기록은 우리 것, 목소리도 우리 것.”
나는 은서의 손을 더 강하게 움켜쥐며 속삭였다. “아니, 이제부터는 우리 거야. 네 아버지가 남긴 건 빼앗길 수 없어.”
마침내 출구를 빠져나왔을 때, 차가운 새벽 공기가 우리를 덮쳤다. 도시의 빛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어딘가 멀리서 아침의 기운이 번지고 있었다.
터널 속의 메아리는 단순한 잔향이 아니었다.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폭풍의 전주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