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부 — 잿빛 성채
황혼의 그림자
비가 멎은 도시는 낯설 만큼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는 곧 폭풍을 예고하는 숨이었다. 은서는 지친 얼굴로 녹음기를 가슴에 안고 걸었고, 지현은 끝없이 무기를 점검하며 긴장된 숨을 내쉬었다. 우리 앞에 솟은 것은 잿빛 성채—설계자의 외곽 요새였다. 건물 외벽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오래된 균열을 품고 있었으나, 내부는 최신 보안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기록하는 자가 종이에 빠르게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여기, 남쪽 벽에 배수구. 그게 가장 약하다.” 행동하는 자가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약한 만큼 피도 많이 날 거야.”
불씨를 지키는 합창
성채 앞 공터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방송국 습격 이후 흘러나온 ‘반대 증언’을 들은 이들이었다. 노래하는 자가 그 무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 낮게, 그러나 힘 있는 음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그 목소리에 따라 사람들은 촛불처럼 작은 불빛을 켜들었다. 은서는 그 광경을 보며 속삭였다. “아버지가 말한 마지막 문… 바로 이 사람들 사이일지도 몰라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이 불씨를 성채 안까지 가져가야 해.” 의사가 상처 난 손을 들어올리며 덧붙였다. “오늘 우리가 증언을 지키지 못하면, 내일은 아무도 말하지 못할 거요.”
침투와 분열
우리는 세 갈래로 갈라졌다. A팀은 배수구를 통해 내부 통로로 진입했고, B팀은 옥상 송신기를 장악하기 위해 사다리를 탔다. C팀은 군중 사이에 섞여 외부를 지키며 합창을 이어갔다. 그러나 설계자들의 그림자도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우산을 든 자들이 광장 가장자리에 나타났고, 그들의 눈빛은 사람들의 불빛을 끄려는 찬 바람 같았다. 행동하는 자가 무전을 날렸다. “내부에 침입자 감지. 전투 준비.” 동시에 내부 증언자가 낮게 외쳤다. “분열을 막아라! 그들이 원하는 건 서로의 불신이다!”
성채의 심장으로
나는 지현과 함께 제어실로 향하는 긴 복도를 달렸다. 벽에는 무한대의 표식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바닥 센서는 우리의 발소리를 수치로 기록하고 있었다. 3:08이 다가올수록 공기는 더 무겁게 진동했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이곳이 진짜 심장부, 기억을 지우고 다시 새기는 회수의 기계장치가 놓인 자리라는 걸. 그리고 그 문을 부수지 못한다면, 우리가 불러낸 모든 증언은 허공에 흩어지고 말 것이다.
제어실 앞에서, 회수 담당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노란 우산을 들고 있었고, 그 눈빛은 싸움과 망설임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너희가 여길 무너뜨리면, 반복은 끝난다. 하지만 그 끝은 너희를 삼킬 수도 있어.” 나는 한 걸음 다가서며 대답했다. “우린 이미 삼켜진 자들이야. 이제는 토해낼 차례지.”
전장의 합창
광장에선 총성과 함성이 동시에 터졌다. 그러나 그 위를 덮은 건 수백 개의 목소리였다. 노래하는 자의 허스키한 음이 불길처럼 번졌고, 시민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노래를 이어받았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합창 속에서 찢겨 나갔다. 설계자의 요원들이 아무리 진압을 시도해도, 사람들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은서는 눈물을 흘리며 녹음기를 높이 들어올렸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사람의 목소리가 곧 증언이다. 그 불은 꺼지지 않는다.”
에필로그의 문턱
03:08, 성채의 심장이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제어실의 기계들이 역류하듯 신호를 뿜어내고, 화면에는 끊임없이 파편화된 기억이 흘러나왔다. 지현이 외쳤다. “지금이야! 증언을 새겨 넣어!” 나는 콘솔에 은서의 녹음기를 연결했다. 도시 전역에 울려 퍼진 목소리—사라진 자들, 살아남은 자들, 그리고 여전히 싸우는 자들의 합창이 하나의 불길로 번졌다.
우리는 성채의 무너지는 천장을 바라보며 서로의 손을 잡았다. 오늘이 끝이 아니란 걸 모두가 알았다. 하지만 분명했다. 우린 ‘어쩔 수 없음’을 부숴버렸고, 이제는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