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부 — 심장부 침투
지도 위의 균열
새벽이 밀려오자 비는 잠시 숨을 죽였다. 우리는 버려진 창고에 둔 야전 테이블 위로 지도를 펼쳐놓고 둘러섰다. 내부 증언자가 표시한 붉은 동심원은 도시의 중앙, 설계자의 본거지—코어 아키브를 가리키고 있었다. 의사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곳은 기억 회수와 주입의 관문이오. 그 문을 닫지 못하면, 우리는 매번 같은 밤을 다시 살게 될 거요.” 노래하는 자는 갈라진 목으로 낮게 허밍을 붙이며 긴장을 눌렀고, 기록하는 자는 종이 가장자리에 조밀한 글씨로 통로와 경비 교대 시간을 옮겨 적었다. 행동하는 자는 붕대를 고쳐 매며 한마디만 던졌다. “들어가 부수고, 나오면 된다.” 은서는 내 옆에서 숨을 길게 토했다. “아버지가 말한 ‘문’… 그게 바로 코어 아키브의 심장일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그 문은 3:08에 열린다. 우리는 그 이전에 안으로, 그 이후에 밖으로.”
세 갈래의 작전
침투 계획은 단순하지만 잔인했다. A팀(나와 지현, 행동하는 자)은 지하 냉각덕트를 통해 내려가 제어실을 장악한다. B팀(내부 증언자와 기록하는 자)은 백업 라인으로 침투해 회수 로그를 조작, 증거를 외부 노드로 실시간 분산한다. C팀(은서와 의사, 노래하는 자)은 외곽 스피커와 옥상 송신기를 장악해 ‘반대 증언’의 합창을 도시 전역에 송출한다. 성호는 마지막 페이지에 굵은 선을 그으며 적었다. “3:00 집결, 3:04 돌입, 3:08 문 변조, 3:12 이탈.” 우리 모두 이 시간이 생존과 몰락의 경계가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검은 탑의 문턱
코어 아키브는 외관만 보면 평범한 데이터 센터였다. 그러나 유리 파사드 뒤에선 무수한 기억의 관들이 하얀 서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입구 로비는 텅 비어 있었으나, 바닥 센서가 밟을 때마다 미세한 초음파의 떨림이 발목을 두드렸다. 지현이 귓속마이크로 속삭였다. “정면 경비 없음. 대신 깊숙한 곳에서 열감지. 우회한다.” 우리는 비상계단을 지나 서비스 복도로 파고들었다. 벽면에는 은색 무한대 표식이 일정 간격으로 박혀 있었고, 그 아래 점자처럼 미세한 요철이 이어졌다. 내부 증언자가 해석했다. “패턴 암호야. ‘선택은 없다—반복은 구조다.’” 행동하는 자가 이를 갈았다. “지금부터 선택이 무엇인지 보여주지.”
지하 덕트의 숨
A팀은 바닥 패널을 들어 올려 냉각덕트 안으로 미끄러졌다. 기화 냉매 냄새가 목을 매웠고, 팬이 도는 소음이 심장을 재촉했다. 지현이 앞장서서 배선다발을 피해 기어갔다. 덕트 끝 격자 사이로 제어실의 푸른 조명이 깜박였다. 그 순간, 상부에서 자동점검 드론이 지나가는 그림자가 비쳤다. 나는 재빨리 타이밍을 재어 격자를 떼고 바닥으로 굴러내렸다. 제어실에는 오퍼레이터 두 명뿐. 행동하는 자가 유령처럼 파고들어 한 명의 팔꿈치를 꺾고, 나는 다른 한 명의 입을 막아 바닥에 눌렀다. 지현이 콘솔에 서비스 키를 꽂으며 속도를 올렸다. “회수 경로 표준값—수동 전환. 3:08 동기화 제동 준비.” 화면 곳곳에 떠오르는 경고창이 피처럼 붉었다.
B팀의 기록 전쟁
동시에 B팀은 백업 플로어에 도착했다. 차가운 랙들 사이, 기록하는 자가 종이에 그려온 회로도를 콘솔로 옮겨 그려 넣었다. 내부 증언자가 인증키를 입력하자, 그들의 오래된 자격이 잠시 살아났다. “캐시 분기 열림. 외부 노드—발화, 폐역, 메아리 방… 모두 연결한다.” 기록하는 자는 손끝이 떨리면서도 펜을 내려놓지 않았다. “지우기를 이기는 방법은 나누기다.” 로그 화면에 줄줄이 찍히는 전송 확인 표시가 작은 승전 깃발처럼 깜빡였다.
C팀의 합창
옥상에서는 바람이 매섭게 깃발을 흔들었다. 은서는 스피커 앰프에 케이블을 꽂고, 의사는 손수건으로 노래하는 자의 입술을 적셨다. “너무 무리하지 마시오.” 노래하는 자가 미소를 지었다. “노래는 내가 가진 마지막 칼입니다.” 은서는 녹음기 재생 버튼과 송신 스위치를 동시에 눌렀다. 박해문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울렸다. “어쩔 수 없다는 연습을 멈춰라. 지금, 여기에서.” 그 위로 쉰 노래가 포개졌다. 도시 아래의 골목마다 창문마다 작은 떨림이 번져갔다.
회수 담당의 귀환
03:06. 제어실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노란 우산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회수 담당이었다. 그는 우산을 접지 않은 채 미소를 지었다. “다시 만났군, 외부조정자.” 나는 총을 겨눴다. “이번엔 길을 양보해.”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길은 양보가 아니라 설계로 생겨. 하지만 오늘은 예외를 만들지.” 그는 우산 끝으로 바닥의 센서를 톡 건드리며 경로를 비틀었다. 경고창 일부가 꺼지고, 다른 일부가 초록으로 바뀌었다. 지현이 낮게 속삭였다. “왜 돕는 거지?” 회수 담당은 짧게 답했다. “균열은 한 번 열리면 스스로 넓어진다.”
3:08, 문을 빼앗다
03:07:49. 나는 콘솔 앞에 선 채 모두의 채널을 한 줄로 묶었다. “모두 준비. 3:08에 회수 창이 열린다. 우린 그 문턱을 뒤집는다.” 수 초가 길게 늘어졌다. 그리고—03:08:00. 공기의 밀도가 변했다. 제어실 천장부터 백업 플로어, 옥상까지 보이지 않는 선들이 켜지듯 흔들렸다. 나는 동기화 제동을 눌렀고, 지현이 경로 재배치를 확정했다. B팀에서 내부 증언자의 목소리가 겹쳤다. “회수 로그, 반대 방향으로! 내보내라—지워진 기억들, 강요된 포기, 묶인 ‘어쩔 수 없음’ 전부!” 로그가 역류했다. 도시 전광판과 개인 단말들로 고통의 파편이, 그러나 이름을 되찾은 이야기로 흘러나갔다. 옥상에서 노래하는 자가 한 옥 더 올렸다. 은서의 외침이 겹쳤다. “우린 선택한다!”
심장의 반격
승리는 늘 반격을 부른다. 코어가 스스로를 봉합하기 시작했다. 자동 방어 프로토콜이 기동하며 바닥 패널이 솟아올랐고, 무인 경비 드론이 제어실 유리창을 깨고 들이닥쳤다. 행동하는 자가 맨손으로 드론의 회전익을 붙잡아 뜯어냈고, 나는 콘솔 뒤 EP 포트를 발로 차 전원을 단락시켰다. 제어실이 순식간에 어둑해졌다. B팀에서도 고함이 들렸다. “카운터 페이로드 감지! 전송 채널 마비 시도!” 기록하는 자가 종이에 쓴 라우팅 테이블을 그대로 키보드에 옮겨 적었다. “대칭을 깨!” 내부 증언자가 마지막 루트를 열며 자신의 자격을 스스로 소각했다. “이제 내 신분은 아무 데도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통하라.”
뒤돌아보는 자
유리 파편과 경고음 사이, 회수 담당이 나를 똑바로 보았다. “돌아보는 법을 익혔나, 외부조정자?” 나는 그가 우산을 들던 손, 움직임의 습관, 그 미세한 망설임을 보았다. “익히는 중이야. 오늘은—네가 나를 설계하지 못해.” 그는 잠깐 웃더니, 우산을 내 앞에 내밀었다. “그럼 이것도 네 선택이야.” 나는 우산을 밀어 제어 콘솔의 과열을 막았다. 그 순간, 그의 어깨에 레이저 조준점이 찍혔다. 상부 발사대에서 광선이 내려꽂히려던 찰나, 행동하는 자가 몸을 날려 그를 밀쳐냈다. 두 사람이 함께 바닥을 구르자, 광선이 콘솔 뒤편을 태웠다. 회수 담당이 숨을 몰아쉬며 일어섰다. “이런 식의 선택은 오랜만이군.”
이탈의 시간
03:11:32. 모든 팀의 송출 잔여치가 90%를 넘겼다. 지현이 결단을 내렸다. “이제 빠져나간다. 복구 전에—” 그때 바닥이 가볍게 흔들렸다. 심장부가 자체 격리를 개시한 것이다. 탈출로가 닫히기 시작했다. A팀은 덕트로 재진입, B팀은 랙 사이 긴급로를, C팀은 옥상 로프를 타야 했다. 우리는 동시 이탈을 맞추기 위해 숨을 죽였다. 3, 2, 1—이탈. 덕트 안은 뜨거운 바람으로 가득했고, 나와 지현은 팬 사이를 스치듯 빠져나왔다. 행동하는 자는 마지막으로 덕트 커버를 닫고 손등으로 철을 두드렸다. “끝났다.”
도시의 응답
지상에 올라오자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엔 비 소리 사이로 다른 소리가 섞여 있었다. 창문마다, 가게 앞마다, 골목 끝마다 사람들이 작은 스피커를 붙들고 있었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의사가 상처 난 손으로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 “그들의 언어가 깨지고 있소.” 노래하는 자가 숨을 고르며 낮게 웃었다.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가 자리를 찾고 있지.” 기록하는 자는 젖은 종이를 가슴에 안고 중얼거렸다. “지워지지 않는 글씨가 있어.” 내부 증언자는 멀리 코어 아키브를 바라보았다. 검은 탑의 상층에서 불빛이 일렁였다. “심장은 아직 뛴다. 하지만 박동은 달라졌다.”
다음 문장
우리는 폐허 옆 처마 밑으로 걸어가 비를 피했다. 은서가 조심스레 녹음기를 꺼내 귀에 대었다. 잡음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은서야, 문 하나 더 있다. 마지막 문은 바깥에 있다. 사람들 사이, 스스로 여는 문.” 그녀가 눈을 감았다 뜨며 웃었다. “아버지는 끝까지… 사람을 믿었네요.” 나는 젖은 바닥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말했다. “좋아. 오늘 우리는 설계된 문을 뒤집었다. 내일은 사람들이 스스로 여는 문을 도와야지.” 지현이 권총의 탄창을 빼내어 건조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행동하는 자는 붕대를 더 꽉 조이며 짧게 답했다. “계속 간다.”
에필로그에 닿기 전
밤은 다시 깊어졌다. 그러나 그 어둠은 처음의 어둠과 달랐다. 전광판엔 여전히 반짝임이 생겼다 사라졌고, 골목 구석마다 작은 합창이 시작됐다. 누군가는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었고, 누군가는 잊힌 노래를 이어 불렀으며, 누군가는 종이에 떨리는 글씨로 첫 문장을 적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친 얼굴,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눈. 나는 내부 채널에 짧은 문구를 남겼다. “3:08, 문을 빼앗았다. 다음 목표—문을 나누자.” 그리고 다시, 비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