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부 — 눈먼 방
빛을 잃은 시작
안개를 가르고 들어온 순간, 우리의 시야는 서서히 닫혔다. 처음에는 주변의 경계가 흐려지더니, 이내 모든 형태가 잉크 번진 종이처럼 사라졌다. 남은 것은 차갑고 거친 바닥의 감촉, 그리고 서로의 숨소리뿐이었다. 의사가 낮게 말했다. “예상대로야. 이번 방은 시각을 제거해 남은 감각으로 우리를 시험하는 거지.” 지현이 발끝으로 바닥을 더듬으며 속삭였다. “누군가 우리를 끌고 가려 해도 눈으론 막을 수 없어. 대신, 귀와 손, 이름으로 버텨야 해.”
은서는 손바닥을 앞으로 뻗었다. 그녀의 손끝이 내 손을 찾았고, 다시 하나씩 팀원들에게 이어졌다. 보이지 않는 끈이 우리를 잇는 순간, 안개 속에서 먼 울림이 들려왔다. “—누가 처음 목소리를 불렀는가?” 방이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감각을 빼앗는 기만
천장에서 미묘한 바람이 흘러내렸다. 동시에 똑같은 발자국 소리가 우리 주위를 빙빙 돌았다. 눈을 잃은 대신 귀를 믿어야 하는데, 소리는 분명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는 착각을 주었다. 행동하는 자가 낮게 외쳤다. “모두 제자리에! 움직이면 패턴에 먹힌다!” 그러나 이미 한 발자국 늦었다. 기록하는 자가 비명을 억누르며 말했다. “내 팔을 누가 잡아—!” 하지만 곧 알았다. 그것은 실제 손이 아니라, 공기의 압축과 울림이 만든 환영의 손이었다.
의사가 침착하게 설명했다. “청각과 촉각을 혼동시키는 장치다. 여기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방법은 단 하나—이름으로 불러 확인하는 것.” 나는 즉시 은서의 이름을 불렀다. “은서!”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여기 있어!” 이름이 진짜 존재를 증명했다.
사라지는 동료, 그리고 되찾기
우린 이름을 서로 불러가며 한 줄로 전진했다. 그러나 노래하는 자의 목소리가 중간에 끊겼다. “여… 기…” 그 뒤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은서가 당황해 외쳤다. “어디 있어요?!” 방은 그의 목소리를 조롱하듯 반향으로 되뿌렸다. “여기… 여기… 여기…”
지현이 이를 악물었다. “진짜는 하나야. 가짜는 반복된다.” 나는 숨을 고르고 정확히 한 번만 불렀다. “재현!”—노래하는 자의 이름. 그리고 잠시 후, 단 한 번의 진짜 대답이 들려왔다. “응!” 그 순간 그의 손이 다시 우리 손끝을 잡았다. 방은 포기한 듯 울림을 거두었다.
우린 깨달았다. 이 시험은 단순히 시각을 빼앗는 게 아니라, 증언의 정확성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헛소문과 반복된 거짓에 휘둘리면 동료는 사라지고, 이름으로만 진짜를 되찾을 수 있었다.
거짓의 목소리와 맞서기
안개가 더 짙어지고, 이번엔 박해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서야, 난 널 탓한다.” 은서가 움찔하며 숨을 삼켰다. 그러나 의사가 즉시 말했다. “멈춰. 저건 반향이 만든 가짜야. 진짜라면 네 이름을 부르며 시작할 거야.” 은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 진짜라면 내 이름을 먼저 불러요.” 그러나 방은 침묵으로만 응수했다. 곧이어 울림은 사라졌다. 지현이 씁쓸하게 웃었다. “진짜는 말하지 않았지. 거짓만이 너를 속이려 했어.”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불러가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발밑은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고, 그 열기가 눈 대신 우리의 방향을 알려주었다. 발자국이 모이는 곳에 출구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출구와 새로운 서약
마침내 안개 속에서 돌문이 드러났다. 시야는 여전히 없었지만,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석재의 질감이 분명히 알려줬다. 돌문 위에는 새겨진 문장이 있었다.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없었지만, 손끝으로 글자를 하나씩 더듬어 읽었다.
“이름을 불러 존재를 증명하라. 거짓을 반복하지 말고, 단 한 번의 진실로 나아가라.”
은서가 가장 먼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은서.” 그 목소리가 벽에 스며들자, 문 위의 돌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이어서 우리 모두가 한 번씩 자기 이름을 불렀다. 이름의 울림이 합쳐지자 거대한 돌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눈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이번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우린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고, 모두 함께 다음 방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사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눈을 잃었지만, 목소리를 얻었군. 이제 다음은—아마 귀마저 시험당할 거다.” 문 너머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우리 모두 긴장했지만, 발걸음은 단단했다. 27부의 시험은 끝났고, 진짜 이름을 지키는 방법을 배웠으니, 더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