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부 — 잿더미 위의 맹세
무너진 성채, 남겨진 불빛
성채가 무너진 새벽, 도시의 하늘은 잿빛 먼지로 뒤덮였다. 콘크리트 파편이 아직도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사람들은 붉은 눈으로 서로를 부축하며 광장을 빠져나갔다. 은서는 흙먼지로 얼룩진 얼굴로 녹음기를 품에 안았다. 기계는 깨졌지만, 그 속의 목소리만은 살아 있었다.
지현은 부러진 팔을 고정시키며 낮게 말했다. “여긴 끝났지만… 설계자들은 이걸로 무너지지 않아. 오히려 더 거세게 반격할 거야.”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빛을 잃은 사람들의 눈동자 속에, 여전히 작은 불씨가 남아 있었다. 합창은 멈췄지만, 그 여운이 골목마다 메아리쳤다. “어쩔 수 없다”는 말 대신, 사람들은 낮게 속삭였다. “우린 선택할 수 있다.”
증언자들의 회합
남쪽 시장의 폐허 건물 안에서 우리는 다시 모였다. 다섯 증언자는 모두 살아남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전투의 흔적으로 뒤덮여 있었다. 의사의 손엔 깊은 상처가, 노래하는 자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기록하는 자의 원고는 절반이 불에 타 있었다.
“하지만 증언은 남았어.” 기록하는 자가 탄 원고 조각을 펼치며 말했다. “이 도시가 기억하는 한, 그들은 절대 지우지 못해.”
내부 증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설계자 내부에서도 균열이 커지고 있어. 오늘의 방송이 그들에게도 균열을 심었지.”
은서는 숨을 고르며 물었다. “그럼 이제 우린 어디로 가야 해요?” 지현이 대답했다. “그들의 심장부는 아직 남아 있어. 북쪽 구역, ‘검은 아카이브’.”
설계자의 반격
밤이 깊어지자, 검은 우산을 든 자들이 다시 거리를 메웠다. 그들은 무너진 성채를 포위한 채 불을 질렀다. 불길은 잔해를 태우며, 살아남은 이들의 기억마저 삼키려는 듯 타올랐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 외쳤다. “도망쳐! 그들은 아직 살아있어!”
나는 은서의 손을 붙잡았다. “이대로 흩어지면 다시 지워진다. 우리 목소리를 모아야 해.”
그러나 설계자들의 우두머리 격인 사내가 광장 중앙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코트에는 여전히 ∞ 모양의 핀이 달려 있었다. 그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기억은 불꽃이 아니다. 불은 꺼진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재를 밟아 없애는 것뿐이다.”
순간, 군중 속에서 두려움이 번졌다. 그러나 동시에 갈라진 목소리가 대답했다. “불은 꺼지지 않는다. 우리는 증언한다.”
다시 불붙는 노래
노래하는 자가 상처 난 목을 움켜쥐고 일어섰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여전히 힘이 있었다. 그는 단순한 음을 반복했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 그 단조로운 리듬이 이내 수십 명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합창은 불길처럼 다시 피어올랐다.
설계자 요원들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의 노래는 더 커졌다. 불은 파괴했지만, 목소리는 지울 수 없었다. 은서는 녹음기를 높이 들며 외쳤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여기 있어요! 그가 남긴 말은—우리가 남깁니다!”
우두머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지만, 그의 요원들조차 잠시 머뭇거렸다. 사람들의 합창에 균열이 스며든 것이다.
잿더미 위의 맹세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날 밤, 무너진 성채의 잿더미 위에서 맹세했다.
“이제 더는 어쩔 수 없다 말하지 않겠다.” “우린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증언은 불처럼 번질 것이다.”
지현이 피 묻은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 맹세가 오늘의 불씨다. 내일은 더 큰 불길이 될 거다.”
나는 은서와 다섯 증언자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모두 달랐지만, 하나의 불꽃으로 합쳐졌다. 잿더미 위에서 태어난 이 맹세는, 설계자의 심장부를 향한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