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25의 게시물 표시

25부 — 균열의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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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부 — 낮의 평온, 그러나 보이지 않는 균열 윤가의 집은 겉보기에 여전히 평화로웠다. 윤 사장은 출근을 했고, 아내는 카페에서 친구들을 만나며 웃음을 지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와 소란스레 뛰어다녔다. 그러나 네 가족에게 그 모든 평화는 껍데기였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 위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다은은 부엌에서 국을 끓이면서도 계단 쪽을 힐끗거렸다.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지만, 그녀의 귀에는 여전히 낮은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손에 쥔 국자를 내려놓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우린 단순히 이 집의 손님이 아니야. 우린 남궁의 시선 안에 갇힌 인질이야.” 석민은 운전 중에도 머릿속에서 남궁의 목소리를 지워낼 수 없었다. “…세상의 소리를 가져와라.” 그는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뒷좌석이 무겁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장난을 치는 동안에도, 그는 마치 또 다른 승객이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을 거두지 못했다. 성호는 아이들의 그림에서 새로운 변화를 보았다. 이번에는 남궁이 단순히 계단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식탁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남궁을 가족의 일원처럼 그려내고 있었다. 그는 공책에 기록했다. “남궁 — 아이들의 무의식 속 동화 완료. 위험성: 절정.” 기우는 과외 중 아이가 무심코 던진 말에 숨을 삼켰다. “선생님, 아저씨가 오늘은 책을 읽고 있었어요.” 아이의 목소리는 장난이 아니었다. 기우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그건 꿈이었을 거야”라고 답했지만, 속으로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남궁은 이제 완전히 위층의 일부가 되었다.” 25부 — 거래의 무게 그날 저녁, 네 가족은 거실에 모였다. 모두의 얼굴은 피로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성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남궁은 이제 더 많은 걸 원할 거야. 단순히 세상의 소리로는 만족하지 못해.” 다은은 두 손을 움켜쥐며 말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해? 거래를 끊으면 우린 끝장이야....

24부 — 균열 속의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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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부 — 낮의 평온, 그러나 변질된 공기 남궁과의 동맹이 맺어진 뒤, 집안의 공기는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윤가의 부부와 아이들은 여전히 웃으며 일상을 이어갔지만, 네 가족은 그 웃음 뒤에 드리워진 어둠을 느끼고 있었다. 낮의 햇살은 창문을 통해 들어왔으나, 그 빛조차 집안의 그림자를 밀어내지 못했다. 남궁은 이제 단순히 지하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는 위층의 공기 속에 스며들었고, 네 가족은 그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다은은 부엌에서 요리를 하면서도 수시로 계단을 힐끗거렸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확신했다. 남궁은 여전히 그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쥔 칼을 내려놓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집은 이제 우리가 아니라, 남궁의 공간이다. 우리는 그저 허락받은 손님일 뿐이다.” 석민은 운전 중 라디오를 들으면서도 남궁의 목소리를 지워낼 수 없었다. “…세상은 썩었지. 하지만 이 집은 다르다.” 그 말은 귓가에 쌓여, 마치 저주처럼 반복되었다. 그는 핸들을 꽉 쥐며 이를 악물었다. “우린 언젠가 이 집에서 쫓겨날 거야. 남궁의 의지에 따라.” 성호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에서 또 다른 변화를 발견했다. 이번에는 남궁이 계단에 서 있는 모습이 아니라, 아이들 옆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아이들은 이미 남궁을 ‘같은 공간의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공책에 적었다. “남궁 — 아이들의 세계에 완전히 스며듦. 위험성: 절대적.” 기우는 과외 중 아이의 말에 차갑게 굳어졌다. “선생님, 아저씨랑 이야기해도 돼요?” 아이는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기우는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아저씨라니… 그런 사람 없어.” 그러나 그의 속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이들은 이제 남궁을 실재로 받아들이고 있다.” 24부 — 거래의 시작 그날 오후, 네 가족은 계단 앞에 모였다. 남궁의 목소리가 문틈 너머로 흘러나왔다. “…너희는 나를 동맹으로 인정했지. 그렇다면 이제 거래를 시작해야지.” 성호가...

23부 — 균열의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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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부 — 낮의 긴장, 스며드는 존재 남궁이 “이 집은 두 주인의 집”이라 선언한 이후, 모든 공기는 달라졌다. 윤가의 웃음소리와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여전히 평범했으나, 네 가족에게 그 평범은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았다. 계단 위로 드리운 그림자는 언제든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남궁의 흔적이었다. 다은은 부엌에서 국을 끓이면서도 수시로 계단을 힐끗거렸다. 아무도 없는데도, 그녀는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문 너머가 아니라, 이제는 집 안에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국자를 떨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린 이미 그의 세계에 들어가 버렸어.” 석민은 운전석에서 손에 땀이 차는 걸 느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와 남궁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세상은 썩었지. 하지만 여기선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그는 이를 악물며 속으로 대답했다. “여긴 시작이 아니라 끝이야.” 성호는 아이들의 그림에서 남궁의 모습을 다시 발견했다. 아이들은 이제 계단 아래에 그를 그리지 않았다. 대신 거실, 부엌, 심지어 아이들 옆에 서 있는 모습까지 그림에 담고 있었다. 그는 공책에 적었다. “남궁 — 아이들의 무의식 속 주인. 존재: 이미 위층에 동화.” 기우는 과외 중 아이의 질문에 얼어붙었다. “선생님, 아저씨는 오늘도 신문을 읽고 있나요?” 아이의 눈빛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저씨라니… 그런 사람 없어.” 하지만 속으로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뇌었다. “남궁은 이제 아이들 세계에까지 들어왔다.” 23부 — 균열 속의 회의 그날 저녁, 네 가족은 거실에 모였다. 모두의 얼굴에는 피로와 두려움이 겹쳐 있었다. 성호가 낮게 말했다. “남궁은 이제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야. 그는 이미 위층의 주인으로 스며들었어.” 다은은 손을 움켜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해? 도망칠 수도 없고, 맞설 수도 없어.” 석민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우린 아직 기회가 있어요....

22부 — 두 주인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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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부 — 낮의 평온, 무너진 균형 남궁이 모습을 드러낸 이후, 집은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하는 기묘한 공간이 되었다. 윤가의 부부와 아이들은 여전히 평범하게 하루를 이어갔지만, 네 가족은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숨 쉴 수 없었다. 낮의 햇살은 환했으나, 그 빛마저도 계단 위에 드리운 그림자를 지워내지 못했다. 다은은 부엌에서 아이들을 위한 간식을 준비하면서도 눈길을 계단 쪽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확신했다. 남궁은 여전히 그곳에 서 있었다. 그는 이제 단순한 목소리가 아니라,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 그들과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칼을 내려놓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집은 이제 우리 것도, 윤가 것도 아니야. 남궁의 집이 되어 가고 있어.” 석민은 운전 중에 라디오를 들으면서도 집중하지 못했다. 뉴스 속 세상의 혼란이 남궁의 목소리와 겹쳐 들렸다. “…세상은 썩었지. 하지만 이 집만은 달라.” 그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핸들을 꽉 쥐며 이를 악물었다. “그가 이 집을 지배하려 한다면, 우린 결국 밀려날 수밖에 없어.” 성호는 아이들의 그림을 다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계단 위에서 웃고 있는 남궁의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공책에 적었다. “남궁 — 이제 그림자 아님. 아이들의 무의식 속에서도 주인으로 자리 잡음.” 기우는 과외 중 아이의 질문에 몸을 굳혔다. “선생님, 그 아저씨랑 인사해도 돼요?” 아이의 말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는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아저씨라니… 그런 사람 없어.” 그러나 속으로는 차갑게 굳었다. “남궁은 이제 아이들의 세계에도 들어왔다.” 22부 — 협상의 붕괴 그날 저녁, 네 가족은 거실에 모였다. 성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남궁은 이제 우리와 같은 공간에 있어. 협상은 끝났어. 그는 이미 우리를 지배하고 있어.” 다은이 손을 움켜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

21부 — 드러난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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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부 — 낮의 침묵, 무너진 선 남궁이 계단을 올라온 순간, 집은 더 이상 예전의 집이 아니었다. 낮의 햇살은 여전히 창문을 비추고 있었지만, 네 가족의 눈에는 모든 빛이 흐릿하게 보였다. 윤가의 웃음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 웃음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다은은 부엌에서 칼을 쥔 채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데도, 그녀의 귀에는 여전히 발걸음 소리가 맴돌았다. 설거지하는 물 위로 남궁의 눈빛이 비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손을 움켜쥐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린 이제 더 이상 숨을 수 없어.” 석민은 운전 중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백미러 속에서 아이들이 웃고 있었지만, 그 뒤로 또 다른 시선이 함께 있는 듯했다. 그의 손은 핸들을 움켜쥔 채 땀에 젖어 있었다. 귓가에는 여전히 남궁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진짜 주인은 나다.” 성호는 아이들의 그림을 펼쳤다. 이번에는 계단 위에 서 있는 남궁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아이들은 얼굴도, 눈빛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그는 차갑게 굳어버리며 중얼거렸다. “아이들은 진실을 알고 있어. 우리가 외면해온 진실을.” 기우는 과외 중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아이가 무심코 말했다. “계단에 있던 아저씨가 오늘은 웃고 있었어요.” 아이의 말은 장난스러웠지만, 그의 몸은 얼어붙었다. 억지로 웃으며 넘겼지만, 속으로는 차갑게 굳어졌다. “남궁은 이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21부 — 그림자와의 대면 그날 오후, 네 가족은 계단 앞에 모였다. 문은 이미 닫혀 있었지만, 그 너머에는 분명히 남궁이 있었다. 성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궁 씨, 왜 올라온 겁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낮고 거친 목소리가 대답했다. “…너희가 나를 불러냈잖아. 나를 인정했고, 나와 거래했지. 이제 내가 여기에 있는 건 당연한 거야.” 다은이 두 손을 움켜쥐며 속삭였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이...

20부 — 금지된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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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부 — 낮에도 들린 울림 남궁의 발걸음은 더 이상 지하에만 머물지 않았다. 낮에도,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와 윤 부부의 웃음소리 사이로 계단을 울리는 미묘한 진동이 스며들었다. 네 가족은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몸이 굳어버렸다. 이제 남궁은 단순히 목소리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움직였고, 그 움직임은 위층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다은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 유리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계단에서 ‘끼익’ 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두 손을 떨며 물을 틀어 소리를 덮었다. 그러나 가슴은 미친 듯이 뛰었고,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석민은 운전석에서 라디오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아무리 크게 해도 남궁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곧 올라가겠다.” 그는 백미러를 바라보다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우린 모두 드러날 거야.” 성호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에서 더 이상 단순한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 아이들은 계단 위에 서 있는 사람을 그리기 시작했다. 웃는 얼굴, 그러나 공포스러운 눈빛. 그는 손으로 그림을 덮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이들은 이미 느끼고 있어. 그가 위로 올라온다는 걸.” 기우는 과외 중 아이가 말한 말을 듣고 얼어붙었다. “선생님, 어제 계단에 앉아 있는 아저씨가 신문을 보고 있었어요.” 아이는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기우는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네 상상이야.” 그러나 그의 내면은 차갑게 굳었다. 20부 — 문틈 너머의 위협 그날 오후, 네 가족은 계단 앞에 모였다. 성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남궁 씨, 왜 자꾸 위로 올라오려는 겁니까?” 문틈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가 불안해하는 걸 알고 싶었다. 균형은 깨지기 전이 가장 흥미롭지.” 다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올라오지 마세요. 그럼 모든 게 무너질 거예요.” 남궁은 낮게 웃었다. “…무너지는 건 이미 시작됐다. 넌 그걸 부정할 수 없잖아.” 석민이 이...

19부 — 무너지는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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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부 — 낮의 불안, 스며드는 그림자 남궁이 신문을 요구하고, 세상의 소식을 받아들인 뒤로 집은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는 단순히 숨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과 자신을 연결하는 끈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네 가족은 더욱 불안해졌다. 균형은 점점 더 위태로워졌고, 경계는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다은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담장 너머로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계단 쪽에 꽂혀 있었다. 그곳은 여전히 닫힌 문이었지만, 언제든 열릴 수 있는 문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물기를 털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린 이미 이 집의 손님이 아니야. 우린 감시받는 존재야.” 석민은 운전석에 앉아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힐끗거렸다. 아이들이 장난을 치며 떠들고 있었지만, 그는 또 다른 그림자가 끼어 있는 듯한 착각을 거두지 못했다. 그 순간,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맴돌았다. “…곧 진실이 드러날 거야.” 그는 핸들을 꽉 쥐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우린 끝장일 거야.” 성호는 아이들의 그림에서 더 이상 단순한 그림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구체적인 형체가 그려져 있었다. 긴 팔, 웃는 얼굴, 계단을 올라오는 모습. 그는 종이를 구겨 버리고 싶었지만, 손이 떨려 그러지도 못했다. “아이들은 이미 진실을 보고 있어. 우린 그 진실을 외면하고 있을 뿐이야.” 기우는 과외 중 아이의 무심한 말에 굳어버렸다. “선생님, 계단 아래 아저씨가 신문을 보고 있던데요.” 아이는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기우는 속으로 피가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그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건 네 꿈일 거야.” 그러나 그의 눈빛은 이미 두려움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19부 — 협상의 균열 그날 저녁, 네 가족은 거실에 모였다. 성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린 선택해야 해. 남궁은 점점 더 많은 걸 원하고 있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이 올 거야.” 다은은...

18부 — 균열 위의 불청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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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부 — 낮의 그림자, 드러나는 균열 남궁의 목소리가 귓속말처럼 스며든 이후, 집 안의 공기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불안으로 가득했다. 윤가의 부부는 여전히 평온한 미소를 지었고, 아이들은 장난스럽게 뛰어놀았다. 그러나 네 가족에게 그 평온은 마치 얇은 유리 위에 놓인 촛불 같았다. 언제 바람이 불어 꺼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다은은 부엌에서 그릇을 닦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지하 계단 쪽에서 아주 미세한 금속성의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마치 낡은 열쇠가 돌려지는 듯한 소리. 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가 문을 열려고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은 쿵쾅거렸고, 손에 쥔 그릇이 덜덜 떨렸다. 석민은 운전석에서 백미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이 떠드는 목소리 뒤로, 뒷좌석에 ‘또 다른 시선’이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계속 들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남궁의 목소리가 반복되었다. “…곧 알게 될 거다. 누가 진짜 주인인지.” 그 말은 예언 같았고, 저주 같았다. 성호는 아이들의 그림을 펼쳐보았다. 이번에는 계단 아래에서 손이 뻗어 올라오는 그림이었다. 세밀하게 묘사된 손톱, 그리고 손끝의 그림자가 아이들의 얼굴을 덮는 모습. 그는 차갑게 굳어버렸다. “아이들은 그를 보았다. 무의식 속에서 이미 인식하고 있다.” 기우는 과외 중 아이가 무심코 남긴 말을 들었다. “선생님, 어제 계단에 앉아 있는 사람을 봤어요.” 아이는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기우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냥 네 상상일 거야.” 그러나 속으로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이제 그는 계단에 앉아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18부 — 문틈 너머의 새로운 요구 그날 오후, 네 가족은 계단 앞에 모였다. 문틈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가 가져온 책, 잘 읽었다. 하지만 더 필요하다.” 성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신문. 매일 아침 세상 소리를...

17부 — 균열 속의 귓속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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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부 — 낮의 미묘한 흔들림 남궁이 이름을 밝히고 나서부터 집은 점점 더 미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 윤가의 일상은 여전히 평온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고, 부부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네 가족에게 이 집은 더 이상 단순히 ‘기회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남궁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림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 다은은 부엌에서 채소를 다듬으면서도 지하 계단 쪽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칼끝이 도마에 닿는 소리 너머로, 희미한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손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그러나 들려오는 건 단순한 착각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석민은 운전을 하면서도 거울을 통해 뒷좌석을 계속 확인했다. 아이들이 장난을 치며 웃을 때도, 그는 백미러 속 그림자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의 머릿속에는 지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균형은 오래 가지 않아.” 그 말이 마치 예언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성호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다시 살펴봤다. 이번에는 계단 아래에 ‘눈을 가진 얼굴’ 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전까지는 단순히 그림자였던 존재가, 점점 뚜렷한 형체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손으로 그림을 가만히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아이들은 이미 그를 본 거야.” 기우는 과외 중 아이의 무심한 말에 몸이 굳었다. “어제 꿈에 어떤 아저씨가 계단에서 절 지켜보고 있었어요.” 아이는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기우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속으로는 차갑게 굳은 채로. “그는 더 이상 숨어 있지 않아. 이 집 전체에 퍼지고 있어.” 17부 — 귓속말의 시작 그날 오후, 네 가족은 계단 앞에 모였다. 문틈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는 요즘 불안하군.” 다은은 움찔하며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당신은 우리에겐 여전히 낯선 사람이에요.” 남궁은 낮게 웃었다. “…낯설다니. 난 이 집의 주인이야. 너희가 오기 훨씬 전부터 이곳을 지켜왔어. 너희는 ...

16부 — 침묵의 균형, 남궁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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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부 — 낮에도 사라지지 않는 기척 남궁이라는 이름이 드러난 이후, 집은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 네 가족은 여전히 겉으로는 평범한 일상을 이어갔다. 다은은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했고, 석민은 차를 몰았다. 성호는 아이들의 미술 치료를 이어갔고, 기우는 과외 수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문틈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기척은 낮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은은 청소를 하다가, 먼지 사이로 희미한 발자국 모양이 지하 계단으로 이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단순한 얼룩일 수도 있었지만, 그녀의 가슴은 세차게 뛰었다. 석민은 운전석에서 백미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이 집의 주인이 아니라, 감시자와 감시 대상이 동시에 되어 버렸다.” 성호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걸 확인했다. 이전에는 단순히 계단만 그렸던 아이들이 이제는 계단 아래 어두운 공간에 ‘사람 모양’을 덧그리기 시작했다. 얼굴 없는 형체, 혹은 미소를 지은 그림자. 그는 그 그림을 보고 손이 굳어 버렸다. 기우는 수업 중 아이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젯밤에도 또 발소리 났어요.” 아이는 장난스러운 듯 웃었지만, 기우는 억지 미소를 지어야 했다. 이제 네 가족은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 남궁은 존재했고, 그 존재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16부 — 남궁의 첫 고백 어느 오후, 아이들과 윤 부부가 외출한 틈을 타 네 가족은 계단 앞에 모였다. 성호가 문틈을 향해 낮게 물었다. “남궁 씨… 당신은 왜 이 집에 머물게 된 겁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는 나를 불청객이라 부르겠지. 하지만 난 오래전부터 이 집의 일부였다.” 석민이 물었다. “언제부터… 계셨던 겁니까?” “…십 년도 더 됐지. 주인이 바뀌어도, 계절이 바뀌어도, 난 늘 여기에 있었다. 밖은 내게 지옥이었다. 빚쟁이, 경찰, 그리고 내 과거. 하지만 이곳은 ...

15부 — 균열 위의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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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부 — 낮의 평온, 깊어지는 불안 윤가의 집은 여전히 평온한 듯 보였다. 아이들은 등교했고, 부부는 출근했다. 거실에는 음악이 흐르고, 부엌에는 커피 향이 가득했다. 그러나 네 가족은 그 평온 속에서 점점 더 깊은 불안을 느꼈다. 그들은 문틈 너머의 존재와 협상을 시작했고, 이제는 단순한 침입자가 아니라 ‘공존의 대상’ 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은은 부엌에서 채소를 다듬으며 손끝이 떨렸다. 칼날이 도마를 칠 때마다 귓가에는 지하에서 들려오는 기침 소리가 겹쳐졌다. 석민은 운전을 하며 백미러를 볼 때마다 뒷좌석에 앉아 있는 낯선 그림자를 떠올렸다. 성호는 아이들의 그림에서 반복되는 계단과 어두운 얼굴들을 지워내려 했지만, 그림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기우는 교재를 펼쳐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에는 지하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맴돌았다. 평온은 껍데기였고, 실제로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긴장 위에서 모두가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서로를 향하면서도, 동시에 지하를 향했다. 균열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15부 — 또 다른 요구 그날 오후, 네 가족은 다시 계단 앞에 모였다. 성호가 조심스럽게 문틈을 향해 말했다. “필요한 게 있습니까?”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목소리가 대답했다. “…책.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다.” 다은이 움찔하며 물었다. “책이요?” “…오래 전부터 난 세상과 단절됐지. 하지만 듣고 싶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석민은 눈을 감으며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단순히 먹을 것과 물을 요구하던 수준에서 이제는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원하고 있었다. 그건 곧 더 큰 욕망의 시작일 수도 있었다. 기우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책을 준비하겠습니다. 대신… 우릴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셔야 합니다.” 문틈 너머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넌 협상가구나. 좋아, 약속하지. 하지만 약속이란 건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걸 잊...

14부 — 드러난 균열, 두 주인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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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부 — 낮의 고요, 흔들리는 균형 라면과 물, 작은 전등을 문 앞에 두고 난 뒤로 집안의 공기는 묘하게 달라졌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윤가의 생활은 이어졌지만, 네 가족에게 이 집은 더 이상 단순한 기회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문틈 너머의 존재와 거래를 시작했고, 그 거래는 곧 불안한 균형을 만들어냈다. 다은은 청소를 하면서 계단 앞에 놓인 빈 라면 봉지를 치웠다. 손끝이 떨렸지만, 동시에 이상한 감정이 스쳤다. “우린 침입자인 동시에 공급자가 되었어. 그와 연결돼 버렸어.” 그녀는 쓰레기를 봉투에 넣으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러나 가슴 깊은 곳에서는 그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라났다. 석민은 운전석에서 집중하지 못했다. 아이들의 웃음과 대화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에는 문틈 너머에서 들린 목소리가 계속 맴돌았다. “…손님이 주인에게 허락을 구하네.” 그는 핸들을 쥐며 이를 악물었다. “언젠가 그가 밖으로 나오면, 우린 모든 걸 잃게 될 거야.” 성호는 아이들의 그림을 분석하며 더 불길해졌다. 그림 속 계단은 점점 더 선명해졌고, 어떤 그림에서는 문틈 사이로 웃는 얼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공책에 기록했다. “아이들의 무의식이 감지하고 있다. 존재는 더 이상 숨어 있지 않다.” 기우는 과외를 하면서 아이가 무심코 남긴 말에 소름이 끼쳤다. “어젯밤에 누군가 계단에서 나를 쳐다봤어.” 아이는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그 순간 기우는 교재를 놓칠 뻔했다. 그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꿈이었을 거야.” 그러나 속으로는 차갑게 굳었다. “아이들도 느끼고 있어. 이제 이 집은 우리만의 공간이 아니야.” 14부 — 협상의 그림자 저녁, 네 가족은 다시 모였다. 거실의 불빛은 환했지만, 그들의 얼굴은 어두웠다. 성호가 말했다. “그와의 협상은 시작됐어.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게 단순히 라면과 전등일까?” 다은은 손을 모아 쥐며 대답했다. “그의 요구가 ...

13부 — 그림자와의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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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 — 낮에도 이어지는 숨소리 그날 이후로 집은 완전히 달라졌다. 금지된 문 뒤의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낸 순간부터, 네 가족의 일상은 균열을 넘어 붕괴의 경계에 서 있었다. 겉으로는 여전히 아무 문제 없어 보였다. 다은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었고, 석민은 운전석에 앉았으며, 성호는 아이들과 미술 치료를, 기우는 과외를 이어갔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언제 문이 열리고, 언제 그 눈빛이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는 공포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낮에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청소기를 돌리던 다은은 갑자기 멈춰 섰다. 문틈에서 아주 희미한 숨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와는 다른, 묵직하고 피로에 절은 듯한 호흡. 그녀는 그 자리에서 걸레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는 낮에도 깨어 있다. 단순히 밤의 그림자가 아니야. 이 집에 뿌리를 내린 또 다른 주민이야.” 그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석민은 운전을 하면서도 뒷좌석을 자꾸 확인했다. 백미러에 비친 아이들의 얼굴 너머, 빈 좌석이 마치 누군가의 체온으로 데워져 있는 듯 보였다. 그는 핸들을 움켜쥐며 속으로 되뇌었다. “이 차에까지 그가 따라온다면, 우린 도망칠 수 없어.” 성호는 정원에서 나무를 다듬으며 귀를 기울였다. 땅 속에서 묘한 진동이 전해졌다. 마치 지하에서 발걸음이 울리는 듯한 느낌. 그는 불현듯 깨달았다. “저 문 뒤의 존재는 단순히 숨는 게 아니라,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 낮에도, 밤에도.” 13부 — 균열 속의 침묵 회의 저녁이 되자 네 가족은 거실에 모였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대화는 속삭임에 가까웠다. 성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우린 선택해야 해. 그와 대립할 건지, 공존할 건지.” 다은은 손을 모아 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존이 가능할까? 그 사람은 우리를 이미 손님이라고 불렀어. 손님은 언제든 쫓겨날 수 있잖아.” 석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어요. 그가 문 밖으로 나오면...

12부 — 균열 속의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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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부 — 낮에도 꺼지지 않는 불안 문틈 너머의 눈동자를 본 이후, 네 가족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겉으로는 여전히 윤가의 가정부, 운전기사, 과외 교사, 미술치료사로서 역할을 충실히 이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성적이 오르고, 부부는 여전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그들 내부는 무너지고 있었다. 다은은 부엌에서 칼을 잡을 때마다 손끝이 떨렸다. 채소를 자르는 단순한 동작조차 위험하게 느껴졌다. 언제든 금지된 문이 열리고, 그 눈동자가 다시 자신을 노려볼 수 있다는 공포가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석민은 운전석에서 가속페달을 밟을 때마다 생각했다. “저 남자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면, 우리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거지?” 성호는 아이들의 그림을 다시 분석했다. 아이들은 어느새 지하 계단을 더 선명하게 그리고 있었고, 어떤 그림에서는 문틈 사이로 웃는 얼굴이 비쳐 있었다. 그는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손에 쥔 펜을 떨어뜨렸다. 기우는 교재를 펼쳐도 집중하지 못했다. 아이의 무심한 질문 ― “선생님, 혹시 집 안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나요?” ― 에 차갑게 굳어버린 얼굴을 숨기느라 애써야 했다. 낮의 평온은 가면일 뿐이었다. 실제로는 매 순간이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네 사람의 발걸음은 더 조심스러워졌고, 눈빛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집은 이제 기회가 아니라 감옥 같았다. 12부 — 다시 들린 목소리 그날 저녁, 아이들과 윤 부부가 외출한 틈에 네 가족은 거실에 모였다. 대화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성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사람… 분명히 우리를 알고 있어. 그 눈빛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어. 우리를 관찰해 왔다는 증거지.” 다은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그 사람에게 뭘 할 수 있겠어? 우린 이미 침입자야.” 기우가 차갑게 말했다. “그래도 선택해야 해요. 모른 척하면 언젠가 우리가 끝날 수도 있어요. 차라리 먼저 말을 걸고, 대화를 시도해 보는 게…” 그 순간, 계단 아래에서 소리가 났...

11부 — 어둠 속에서 마주친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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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부 — 낮의 평온, 속삭이는 불안 윤가의 집은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흘러갔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부부는 평범한 일상을 이어갔다. 집 안의 구조와 동선은 언제나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네 가족에게 이 평온은 마치 얇은 유리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 금지된 문 너머에서 들은 목소리, 그리고 안쪽에서 흘러나온 웃음소리가 계속 머릿속을 때렸다. 다은은 청소기를 돌리면서도 손끝이 떨렸다. 지하 계단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무심코 문틈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얼굴을 돌렸다. “아니야, 그냥 착각이야…” 그러나 귀에는 여전히 낮은 숨소리가 맴도는 것 같았다. 석민은 운전 중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백미러 속에서 뒷좌석의 그림자가 낯설게 보였다. 아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는 종종 뒷좌석에 ‘한 사람 더’ 있는 듯한 환영을 느꼈다. 그는 땀에 젖은 손으로 핸들을 움켜쥐며 속으로 되뇌었다. “저 문이 열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어. 하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성호는 정원의 잡초를 뽑으며 땅에 귀를 기울였다. 땅 속에서 미세하게 울려 나오는 진동, 마치 누군가 지하에서 움직이는 듯한 감각.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문 너머의 존재는 단순히 숨어 있는 게 아니라, 점점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우는 과외를 하며 아이들의 글 속에 숨어 있는 불안을 읽었다. 소연은 무심코 “밤마다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려”라고 적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기우의 손이 굳어졌다. 그는 그 문장이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11부 — 균열 속에서 모인 가족 저녁, 네 가족은 다시 모였다. 식탁 위에는 차갑게 식은 밥그릇이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성호가 낮게 말했다. “그 목소리… 분명 사람이야.” 그의 눈빛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은은 떨리는 손으로 물컵을 움켜쥐며 속삭였다. “우리… 이미 선을 넘은 거 아닐까. 원래 이 집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그 사람일지도 몰라.” ...

10부 — 문 너머의 세계가 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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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부 — 숨길 수 없는 진실 그날 밤, 네 가족은 서로 다른 방에서 누워 있었지만,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 성호는 공책을 펼쳐 메모를 했지만 글자가 제멋대로 흩어졌다. 석민은 베개를 끌어안은 채 천장을 노려보았다. 다은은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몸을 웅크렸다. 기우는 노트를 펴놓고 있었지만, 펜끝은 종이 위를 맴돌 뿐 한 글자도 적히지 않았다. 그들의 의식은 온통 문틈 너머에서 들은 목소리에 사로잡혀 있었다. “…거기 누구야?” 낯설고 갈라진 남자의 목소리. 그것은 환청이 아니었다. 네 가족은 똑같이 들었다. 그 목소리는 단순히 누군가의 존재를 알린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계획 전체가 얼마나 위태로운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폭로하는 소리였다. 집은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 이미 다른 주인을 품은 덫이었다. 그 사실을 인식한 순간, 안심은 산산조각 났다. 아침이 밝았지만 공기는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네 가족은 서로 눈치를 보며 평소처럼 행동했지만, 그들 사이에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제는 누구도 이 집을 “기회”라 부를 수 없었다. 그것은 함정이었고, 언젠가 폭발할 수밖에 없는 시한폭탄이었다. 10부 — 낮의 고요 속에서 자라는 불안 낮이 되자 아이들은 학교로, 윤 부부는 출근길로 향했다. 집은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 속에서 불안은 더 크게 자라났다. 다은은 청소기를 돌리다 갑자기 멈췄다. 귀에 익숙한 기침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낮게 깔린, 오래된 기침. 분명 금지된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청소기를 끄고 걸레를 쥔 채 계단으로 다가갔다. 문틈 아래로 스며드는 바람이 따뜻했다. 마치 사람의 숨결 같았다. 그녀는 온몸이 오싹해져 뒤로 물러났다. 석민은 운전 일정을 정리하며 손을 떨었다. 그는 이제 이 집을 안전하게 오갈 수 있는 ‘운전기사’가 아니라, 곧 드러날 비밀의 공범자였다. 뒷좌석에 앉은 아이들이 무심히 “지하에서 이상한 소리 들었어”라고 말할 때마다 등골이 서늘했다. 그는 백미러로 ...

9부 — 문틈 너머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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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부 — 긴장으로 잠 못 이루는 밤 밤은 유난히 길었다. 창밖에선 빗줄기가 얇게 이어졌고, 고요한 정원에는 개구리 울음소리마저 멎은 듯했다. 그러나 집 안의 네 가족은 아무도 편히 눕지 못했다. 석민은 운전석에서 들었던 낯선 울림이 귓가에 맴돌아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다. 다은은 부엌의 시계를 바라보며 분침이 움직일 때마다 심장이 덜컥거렸다. 성호는 아이들이 그린 검은색 계단을 떠올리며, 그 이미지가 단순한 상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지우지 못했다. 기우 역시 교재를 펴놓은 채 줄줄 흘러내리는 글씨를 붙잡지 못했다. 그들의 모든 의식은 하나의 지점으로 모였다. 금지된 문. 집은 평화롭게 보였다. 그러나 네 가족의 머릿속에서는 같은 질문이 맴돌았다. “저 문 뒤에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는 정말 안전한가.” 긴장 속에서 지나간 시간은 아침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아침이 밝자, 그들은 서로의 눈에서 같은 공포를 확인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숨겨진 균열이 현실로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9부 — 낮에도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 낮이 되자 집은 평소처럼 활기를 되찾았다. 아이들은 등교했고, 윤 부부는 출근 준비를 하며 차분히 대화를 나누었다. 거실에는 음악이 흐르고, 부엌에는 커피 향이 번졌다. 그러나 네 가족의 불안은 낮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은은 청소기를 돌리다 문틈에서 바람 대신 묘한 냄새를 맡았다. 눅눅한 흙냄새, 오래된 습기, 그리고 희미한 담배 냄새까지. 그녀는 재빨리 청소기를 끄고, 걸레로 문틈을 닦으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그냥 오래된 냄새일 뿐이야…” 그러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성호는 정원의 나무를 다듬다가 유리창에 비친 계단의 그림자를 보았다. 햇빛이 비스듬히 떨어져 계단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그림자 속에서 그는 순간, 사람의 형체 같은 것을 보았다. 실제로 있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뇌리는 이미 결론을 내렸다. “저 ...

8부 — 균열이 만든 초대받지 않은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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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 — 폭풍 전야의 집 집 안은 여전히 평온해 보였다. 아이들은 공부와 취미 활동에 몰두했고, 부모는 일상적인 일정을 소화했다. 그러나 네 가족에게 이 집은 더 이상 평범하지 않았다. 그들은 금지된 문 너머에 숨은 존재를 의식하며, 하루하루를 긴장 속에서 버텼다. 성호는 아이들의 그림을 분석하며 점점 더 섬뜩한 기운을 읽어냈다. 그림에는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반복해서 등장했고,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림 속에서 그 계단을 검은색으로 덧칠했다. 석민은 운전석에서 늘 백미러를 확인했다. 마치 뒷좌석에 보이지 않는 승객이 타고 있는 것 같은 환영에 사로잡혔다. 다은은 청소를 하다가 문틈에서 나는 바람 소리조차 사람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기우는 과외 중에도 아이의 시선이 자꾸 지하 계단 쪽으로 향하는 것을 눈치챘다. 폭풍우가 몰아친 어느 밤, 번개가 창을 스치자 잠시 집 전체가 흰빛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그 순간, 네 가족 모두는 동시에 들었다. 금지된 문 너머에서 울려 나온 둔탁한 소리. 마치 무언가가 넘어지며 바닥을 친 듯한 울림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지만,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거기엔 분명 누군가 있다.” 8부 — 균열을 외면하는 사람들 다음 날 아침, 윤가의 부부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웃으며 출근 준비를 했다. 아이들도 평소처럼 학교에 갔다. 그러나 네 가족은 밤새 잠을 설쳤다. 다은은 부엌에서 청소기를 돌리며 기도를 하듯 중얼거렸다. “제발, 제발 오늘은 아무 일도 없기를.” 석민은 일정표를 보며 손에 땀이 맺혔다. 단순한 운전이 아니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발물 옆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성호는 아이들에게 미술 치료를 하며 자신도 모르게 더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아이들이 그린 검은 계단은 이제 단순한 낙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언가를 본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무의식의 기록이었다. 그러나 윤가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에게 집은 여전히 안전했...

7부 - 어둠 속의 또 다른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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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 불청객의 정체를 의심하다 금지된 문 앞에서 흘러나오던 낮은 소리와 낯선 흔적들은 네 가족의 머릿속에 날마다 파문을 일으켰다. 석민은 운전석에 앉아도 마음이 온전히 길 위에 있지 않았다. 백미러로 보이는 집의 뒷모습, 특히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떠올릴 때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은은 부엌을 닦으며 언제든 계단 쪽에서 누군가 올라올 것 같은 환영을 떠올렸고, 성호는 아이들의 그림에서 계속해서 기묘한 상징을 발견했다. 아이들은 무심코 지하의 계단을 그리고, 문틈을 덧칠하며, 때로는 어둡게 뒤덮인 얼굴 없는 인물을 표현했다. 성호는 이를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그는 아이들이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고 믿었다. 낮에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림을 칭찬했지만, 밤이 되면 그의 공책에는 빼곡히 분석이 적혔다. ‘아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 불청객의 그림자가 아이들의 무의식에 각인됨.’ 그는 적으며 떨리는 손을 꼭 쥐었다. 그러나 정작 아이들의 부모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에게 집은 여전히 평화롭고 안전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 가족은 알고 있었다. 이 집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발자국이 있다는 것을. 7부 —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온 진실 그날 밤, 폭우가 도시를 뒤덮었다. 번개가 유리벽을 스치며 푸른빛을 쏘아 올릴 때, 다은은 계단을 내려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장갑을 끼고 걸레를 든 채로, 그녀는 문틈에 귀를 가져다 댔다. 바람소리인지, 아니면 사람의 숨소리인지 구분하기 힘든 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놀라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지만, 곧장 다시 다가갔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물을 끓이는 듯한 ‘부글부글’ 소리가 들렸다. “이럴 리가 없어.”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단순 창고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날 리 없다. 주전자, 가스레인지, 혹은 작은 전열기 같은 것이 돌아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즉, 그 안에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사람의 생활’이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그녀는 차갑게 ...

6부 - 숨겨진 문, 열리지 않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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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 금지된 문 앞에서 집 안에서 가장 미묘한 긴장감을 뿜어내는 공간은 언제나 ‘금지된 곳’이었다. 주방과 거실, 스터디룸과 정원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지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끝에 자리한 작은 문만큼은 달랐다. 그 문은 늘 잠겨 있었고, 열쇠를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도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문틀에는 오래된 패드락 자국이 남아 있었고, 문 하단의 틈새로는 바람이 스치듯 먼지가 흘러나왔다. 다은은 매일 청소를 하면서도 그 문 앞에서 손길을 멈췄다. 걸레로 먼지를 닦아내는 일은 반복했지만, 안쪽의 세계를 상상할수록 오히려 더 닦아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이 집은 완벽해야 해. 내가 닦지 않으면 누군가 흔적을 남길지도 몰라.” 그녀는 장갑 낀 손으로 문을 스쳤고, 얇은 금속의 차가움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어느 날은 아이들이 그 문 앞을 지나며 무심코 물었다. “여긴 뭐 하는 데예요?” 차인정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창고야. 필요 없는 물건들 두는 곳.” 그러나 아이들의 눈빛은 순간 호기심으로 번뜩였다. 금지된 것은 언제나 매혹적이니까. 다은은 아이들이 계단을 내려오지 못하게 일부러 소음을 냈다. “위로 올라가렴, 곧 저녁 준비할 거야.” 그날 밤 그녀는 오랫동안 뒤척이며 생각했다. ‘창고라면 왜 굳이 잠가 둘까. 왜 문틈에서 사람 냄새 같은 것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걸까.’ 성호 역시 그 문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발걸음을 늦췄다. 전기공으로 일하던 그는 작은 소리에도 민감했다. 문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미세한 전류음, 마치 오래된 보일러가 가동될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다. “단순 창고라면 이런 소리가 날 리가 없지.”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직접 열어 확인하기에는 위험이 너무 컸다. 이 집의 신뢰를 잃는 순간, 그들의 계획 전체가 무너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지된 문은 이제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네 가족 모두의 머릿속에 뿌리내린 의문이었다. 그 문을 열어야만 더 큰 그림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

5부 - 낯선 집의 오래된 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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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 집 안에는 여전히 낯선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창고 구석에서 발견한 낡은 담요, 오래전부터 놓여 있었던 듯한 통조림, 계단 턱의 고무패킹이 닳은 자국, 그리고 지하에서 간혹 풍겨 오는 이상한 비누 냄새. 다은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건 문여사의 향이 아니었다. 문여사는 라벤더 향을 즐겼지만, 이건 더 싸고 날카로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냄새였다. 그녀는 청소를 하면서도 그 냄새를 무시할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 여전히 이 집 어딘가에 살고 있는 듯했다. 로봇청소기가 금지된 문 앞에서 멈춘 날, 다은은 심장이 잠시 굳는 걸 느꼈다. 청소기의 작은 바퀴가 턱에 걸려 헛돌았을 뿐이지만, 그 순간 금지된 문 너머에서 은은한 ‘툭’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안에서 무심히 떨어뜨린 듯한, 그러나 분명 내부에서만 날 수 있는 소리였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지만,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집은 언제나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다. 대신 ‘손대지 말라’는 표지를 곳곳에 남긴다. 그 표지를 어기는 순간, 집은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대신 삼켜 버린다. 5부 — 완벽과 불청객 사이 주말이면 윤가에는 간혹 손님이 들렀다. 번쩍이는 파티는 아니었지만, 와인이 열리고 소파에 사람들이 앉아 수다를 떨었다. 그런 날이면 석민은 주차를 정리하고, 성호는 정원의 조명을 점검했으며, 다은은 부엌 동선을 미리 비워 두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불청객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틈에서 나타났다. 어느 날,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비가 쏟아졌다. 현관에서 낯선 발소리가 들렸고, 차인정이 문을 열었지만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문 아래엔 작은 비닐봉투가 놓여 있었다. 안에는 라면, 통조림, 물티슈가 들어 있었다. 다은은 그것이 집안에서 필요하지 않은 물품이라는 걸 단번에 알았다. 오히려 그것들은 이 집과 전혀 다른 삶의 흔적처럼 보였다. 그녀는 봉투를 들고 잠시 망설이다가 재활용함에 버렸다. 그러나 그 순간, 금지된 문 너머에...

4부 - 균열의 시작, 안심의 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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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 말보다 먼저 고개를 끄덕이는 법 성호는 늘 말이 적은 사람이었다. 반지하의 눅눅한 공기 속에서도 그는 불필요한 말을 덜어내며 살았다. 하지만 침묵이 곧 무능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표정을 읽고, 고개를 끄덕여야 할 순간과 눈을 피해야 할 순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런 태도는 윤가(尹家)의 집 안에서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했다. 아이들과의 첫 만남에서도 그는 군더더기 없는 접근법을 택했다. 색연필을 세 가지 색으로만 제한하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선을 긋게 했다.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지루하지도 않은 방식. 그는 그림 속에서 아이들이 지닌 불안을 구체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대신 “선이 단단하네, 피곤해 보이지 않아”와 같이 부모가 듣고 싶어 하는 안전한 문장을 내놓았다. 부모가 원하는 것은 사실 진단이 아니라 위로였다. 그리고 위로는 때로 의학적 근거보다 더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차인정은 그 말에 안도했고, 아이들 또한 큰 부담 없이 ‘치료’라는 명목을 즐겼다. 성호는 스스로의 역할을 최소화하면서도 존재감을 지웠다. 그의 전략은 단순했다. “내가 있음을 알리되, 내가 필요함을 강조하지 않는다.” 존재는 필요에 의해 소환되고, 필요는 곧 신뢰로 이어진다. 그는 말 대신 고개를 먼저 끄덕임으로써, 이미 ‘동의와 이해’를 선점한 뒤 차분히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화는 늘 현실이 되었다. 4부 — 균열은 가장 조용한 곳에서 자란다 네 가족이 모두 이 집에 들어와 각자의 껍데기를 쓴 이후, 오히려 그들 사이의 연대는 조금씩 흐트러졌다. 반지하에서는 서로의 기침 소리까지 나누며 살았던 이들이, 이제는 각자 다른 공간과 역할 속에서 분리된 듯 움직였다. 석민은 운전석에서 얻은 대화와 정보를 혼자 품었고, 다은은 금지된 문 앞에서 느낀 기묘한 정적을 마음속 깊이 묻어 두었다. 성호는 아이들의 그림 속 단서를 홀로 해석하며, 가족에게 굳이 전하지 않았다. 이런 균열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차곡차곡 쌓...

3부 - 새 그림자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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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 문턱을 낮춘 사람 집 안의 두 번째 요직은 주방과 세탁실, 즉 ‘리듬’의 심장부였다. 오랜 세월 집을 지켜 온 가사도우미는 꼼꼼했지만, 비가 오면 알레르기와 기침이 도졌다. 어느날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젖히며 “오늘은 좀 쉬어야겠다”고 말했다. 그 틈을 타서 석민은 조심스럽게 제안을 꺼냈다. “청결에 굉장히 철저한 분이 계세요. 위생 교육 자격증도 있고요.” 그 말은 과장과 진실의 경계에 서 있었다. 자격증의 이름은 실제였으나, 용도는 달랐다. 다은은 오래된 다리미를 내려놓고 장갑을 꼈다. 반지하에서 배운 가장 효율적인 동선, 물때와 곰팡이를 분리해서 다루는 습관, 도마와 칼, 행주를 색으로 구분하는 루틴을 집 안으로 들였다. 첫날 저녁, 그녀가 닦아 놓은 싱크대는 유리처럼 반짝였고, 냄비 뚜껑의 물방울은 원형 그대로 말랐다. 차인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말 꼼꼼하시네요”라고 말했는데, 그 말에는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안도의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3부 — 집의 숨결을 외우다 다은은 집의 숨결을 외웠다. 세탁기가 조용해지는 시간, 보일러가 단번에 반응하지 않는 타이밍, 로봇청소기가 늘 멈추는 카펫의 모서리. 그녀는 문제를 ‘고치는’ 대신 ‘먼저 맞춰’ 해결했다. 그러자 집은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대신, 익숙함을 스스로 덧칠했다. 그녀는 냉장고 안 식재료를 정리하며 소비 기한을 달력에 요일 색으로 표시했다. 금요일은 푸른 점, 일요일은 붉은 선. 목요일에는 미리 장보기 리스트를 작성해 두었다. 주방의 리듬이 고르게 뛰기 시작하자 가족의 대화가 부드러워졌다. 이 작은 변화가 곧 신뢰의 총합이 된다. 어느 날 차인정은 돌아서는 발을 멈추고 말했다. “문여사가 완쾌하기 전까진… 당분간 부탁드릴게요.” 당분간이라는 부사가 계절만큼 길어질 수 있다는 걸, 다은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3부 — 금지된 문과 낮은 계단 집은 신뢰를 주는 동시에, 경계도 선명하게 그어 놓았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중간에 ‘창고’라고 붙은 낮은 문이...

2부- 사다리의 두 번째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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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빗속에서 열린 운전석 폭우가 골목을 씻어 내리던 오후,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와 동시에 차인정의 다급한 목소리가 인터폰을 타고 내려왔다. “혹시 면허 있다고 하셨죠? 기사분이 오늘은 연락이 안 돼요.” 석민은 심장이 가볍게 솟구치는 걸 눌러 담고 “가능합니다”라고 짧게 답했다. 운전석에 앉는 일은 단순히 차를 움직이는 기술이 아니라, 집의 리듬에 맞아 들어가는 의식이었다. 시트 포지션을 잡고 백미러를 맞추는 사이, 그는 눈동자만으로 콘솔의 생활 흔적을 훑었다. 조수석 수납함에 접힌 영수증 뭉치, 기어 노브 근처에 엷게 남은 방향제 얼룩, 대시보드 위 세워 둔 가족 사진의 각도. ‘사소함은 습관의 표정이다.’ 그는 비 내리는 도로에 부드럽게 합류하면서 브레이크를 두 번 나눠 밟았다. 차 안이 기우뚱하지 않도록 속도를 빼자, 차인정의 어깨가 눈에 띄게 풀렸다. “안정적으로 몰아 주시네요.” 그 말은 칭찬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신뢰’라는 통행증이었다. 라디오에서 클래식 선율이 흐르자 아이들의 대화가 유리처럼 투명해졌다. 소연은 다음 주 모의면접을 걱정했고, 이안은 축구부 선발전을 입에 올렸다. 차인정은 전화로 남편의 일정을 조정하며 “금요일엔 본가에 들러야 한다”고 말했다. 운전석은 집 바깥 세상의 궤도를 한눈에 읽을 수 있는 자리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와이퍼가 마지막 물기를 쓸어 내렸다. 차문이 닫히고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동안, 석민은 마음속 사다리의 두 번째 칸을 손끝으로 눌러 보았다. 아직 약하지만 충분히 몸을 올려도 부러지지 않을 것 같은 탄력. 그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안심은 기술에서 나오고, 기술은 관찰에서 나온다.” 2부 — 안심을 만드는 기술 이후로도 그는 픽업과 심부름을 간헐적으로 맡았다. 맡을 때마다 작은 체크리스트를 업데이트했다. 출발 전 타이어 공기압, 주차장 센서 위치, 집 앞 경사로의 젖은 낙엽 분포, 골목 초입에 서는 택배 트럭의 시간대. 그는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 ...

1부 - 비밀정원, 첫 문을 두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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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 아래층에서 위를 본다는 것 창문이 반쯤 땅에 묻힌 반지하 방. 창틀과 맞닿은 벽에는 여름 장마 때마다 스며든 습기의 흔적이 희끄무레한 곰팡이 지도를 그려 두었다. 석민은 그 지도에서 늘 북쪽을 찾듯 시선을 위로 올렸다. 위층 사람들의 발걸음, 복도에서 누가 웃고 떠들었는지, 분리수거하는 시간에 들려오는 플라스틱 부딪히는 소리까지, 옅은 진동으로 그의 하루를 흔들었다. 일터가 문을 닫은 지 석 달, 구직 사이트의 알림은 매번 ‘경력 우대’라는 얼룩 같은 문장을 남겼다. 그 얼룩이 지워지지 않는 동안, 반지하의 공기는 습기와 가스 냄새, 그리고 부모의 낮은 한숨으로 더 포개졌다. 어머니 다은은 새벽마다 가까운 식당에서 김치통을 나르고, 오후에는 동네 카페에서 설거지와 바닥을 닦았다. 아버지 성호는 전기 공사 현장에 일감이 생기면 나갔지만, 일이 뜸한 날이면 집 안에 쌓아 둔 낡은 콘센트와 케이블을 들여다보며 ‘쓸모’의 길을 더듬었다. 오래된 부품을 닦아 새것처럼 포장하는 손놀림은 능숙했지만, 그 ‘새것’은 늘 집 안에서만 반짝였다. 그날도 비가 오려는지 도시의 기압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노란 형광등 아래, 석민은 중고 노트북 화면을 넘기다가 채팅창으로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대학 동기였던 지후였다. “야, 너 영어 과외 아직도 하나도 안 잡혔냐?” 라는 인사 뒤에, 지후는 사진 한 장을 보냈다. 청담 언덕 위, 유리 박스로 둘러싸인 대저택. 마당 끝의 은빛 수영장과 휘어진 소나무, 비에 젖어도 번들거리는 돌계단. 그 사진만으로도 ‘위’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지후는 말했다. “윤 회장네. 광고 대기업. 딸이 중2라는데, 외국 학교 준비 한다더라. 내가 유학 가서 그만둬야 해서—대체 과외 구하는 중.” 입 안이 마른 석민은 장난처럼 웃는 이모티콘을 붙여 물었다. “하루에 얼마?” 돌아온 금액은 그의 한 달 알바비의 절반에 가까웠고, 그 숫자 하나로 반지하의 공기가 조금은 맑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문제는 증명 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