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 새 그림자의 입장

3부 — 문턱을 낮춘 사람

집 안의 두 번째 요직은 주방과 세탁실, 즉 ‘리듬’의 심장부였다. 오랜 세월 집을 지켜 온 가사도우미는 꼼꼼했지만, 비가 오면 알레르기와 기침이 도졌다. 어느날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젖히며 “오늘은 좀 쉬어야겠다”고 말했다. 그 틈을 타서 석민은 조심스럽게 제안을 꺼냈다. “청결에 굉장히 철저한 분이 계세요. 위생 교육 자격증도 있고요.” 그 말은 과장과 진실의 경계에 서 있었다. 자격증의 이름은 실제였으나, 용도는 달랐다. 다은은 오래된 다리미를 내려놓고 장갑을 꼈다. 반지하에서 배운 가장 효율적인 동선, 물때와 곰팡이를 분리해서 다루는 습관, 도마와 칼, 행주를 색으로 구분하는 루틴을 집 안으로 들였다. 첫날 저녁, 그녀가 닦아 놓은 싱크대는 유리처럼 반짝였고, 냄비 뚜껑의 물방울은 원형 그대로 말랐다. 차인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말 꼼꼼하시네요”라고 말했는데, 그 말에는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안도의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3부 — 집의 숨결을 외우다

다은은 집의 숨결을 외웠다. 세탁기가 조용해지는 시간, 보일러가 단번에 반응하지 않는 타이밍, 로봇청소기가 늘 멈추는 카펫의 모서리. 그녀는 문제를 ‘고치는’ 대신 ‘먼저 맞춰’ 해결했다. 그러자 집은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대신, 익숙함을 스스로 덧칠했다. 그녀는 냉장고 안 식재료를 정리하며 소비 기한을 달력에 요일 색으로 표시했다. 금요일은 푸른 점, 일요일은 붉은 선. 목요일에는 미리 장보기 리스트를 작성해 두었다. 주방의 리듬이 고르게 뛰기 시작하자 가족의 대화가 부드러워졌다. 이 작은 변화가 곧 신뢰의 총합이 된다. 어느 날 차인정은 돌아서는 발을 멈추고 말했다. “문여사가 완쾌하기 전까진… 당분간 부탁드릴게요.” 당분간이라는 부사가 계절만큼 길어질 수 있다는 걸, 다은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3부 — 금지된 문과 낮은 계단

집은 신뢰를 주는 동시에, 경계도 선명하게 그어 놓았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중간에 ‘창고’라고 붙은 낮은 문이 하나 더 있었다. 문틀엔 얇은 패드락 자국이 남아 있었고, 문의 하단에는 바람이 스칠 때마다 종이처럼 떨리는 먼지가 고였다. 다은은 그 문을 청소할 때 장갑 끝으로만 스쳤다. “여긴 손대지 말 것”이라는 말이 직접적이지 않게, 그러나 반복적으로 전해졌다. 금지된 장소는 늘 상상력을 부른다. 다은은 그 상상력을 가족에게 옮기지 않으려 했다. 그럴수록 금지된 곳은 더 오래 머릿속에 남는다. 언젠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밤, 계단을 타고 내려오던 물 그림자가 그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그 멈춤을 오래 기억했다. 집은 비밀을 숨길 때, 먼저 소리를 낮춘다. 그리고 그 낮아진 소리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있었을 때, 비밀은 자신의 존재를 잊고 문틈으로 잠깐 흘러나온다. 다은은 그 흐름을 보았다. 하지만 문을 열진 않았다. 아직은.

3부 - 새 그림자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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