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부 — 균열 위의 동맹
15부 — 낮의 평온, 깊어지는 불안
윤가의 집은 여전히 평온한 듯 보였다. 아이들은 등교했고, 부부는 출근했다. 거실에는 음악이 흐르고, 부엌에는 커피 향이 가득했다. 그러나 네 가족은 그 평온 속에서 점점 더 깊은 불안을 느꼈다. 그들은 문틈 너머의 존재와 협상을 시작했고, 이제는 단순한 침입자가 아니라 ‘공존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은은 부엌에서 채소를 다듬으며 손끝이 떨렸다. 칼날이 도마를 칠 때마다 귓가에는 지하에서 들려오는 기침 소리가 겹쳐졌다. 석민은 운전을 하며 백미러를 볼 때마다 뒷좌석에 앉아 있는 낯선 그림자를 떠올렸다. 성호는 아이들의 그림에서 반복되는 계단과 어두운 얼굴들을 지워내려 했지만, 그림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기우는 교재를 펼쳐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에는 지하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맴돌았다.
평온은 껍데기였고, 실제로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긴장 위에서 모두가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서로를 향하면서도, 동시에 지하를 향했다. 균열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15부 — 또 다른 요구
그날 오후, 네 가족은 다시 계단 앞에 모였다. 성호가 조심스럽게 문틈을 향해 말했다. “필요한 게 있습니까?”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목소리가 대답했다. “…책.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다.”
다은이 움찔하며 물었다. “책이요?” “…오래 전부터 난 세상과 단절됐지. 하지만 듣고 싶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석민은 눈을 감으며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단순히 먹을 것과 물을 요구하던 수준에서 이제는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원하고 있었다. 그건 곧 더 큰 욕망의 시작일 수도 있었다.
기우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책을 준비하겠습니다. 대신… 우릴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셔야 합니다.” 문틈 너머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넌 협상가구나. 좋아, 약속하지. 하지만 약속이란 건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그 말은 네 가족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협상은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유리 조각 같았다.
15부 — 균열 속의 대화
다음 날, 네 가족은 책 몇 권을 준비해 계단 앞에 두었다. 역사책, 소설, 잡지까지 다양했다. 문틈 너머로 손이 나왔다. 뼈처럼 마른 손, 그러나 놀랍도록 힘 있는 움직임이었다. 다은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쳤다. 그 손은 책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맙다.”
성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우릴 조금은 믿으십니까?”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대답이 들려왔다. “…믿음이란 건 위험한 단어지. 하지만 적어도 넌 내 목소리를 들으려 한다.”
석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린 지금 균열 위에서 동맹을 맺고 있다. 하지만 동맹은 언제든 배신으로 바뀔 수 있어.”
기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름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한참의 침묵 끝에,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나를 ‘남궁’이라 불러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네 가족은 놀란 눈빛을 교환했다. 이름은 정체성이었고, 정체성은 곧 힘이었다. 이제 그들은 단순히 ‘문틈 너머의 그림자’가 아니라, ‘남궁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과 마주하고 있었다.
15부 — 균열 위의 동맹
남궁과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네 가족의 불안은 더 커졌다. 그는 단순히 생존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여전히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를 원하고 있었다.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듣고, 라면을 끓이는 그의 일상은 지하의 감옥을 넘어선 ‘또 다른 삶’이었다.
다은은 침대에 누워도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문틈에서 본 남궁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석민은 운전을 하며 라디오 뉴스를 들을 때마다 불안해졌다. 언젠가 남궁이 직접 세상의 소식을 듣게 되면, 그의 욕망은 더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호는 공책에 기록했다. “남궁 — 이름 확인. 요구: 음식, 물, 전등, 책. 성격: 냉소적, 관찰자. 위험성: 잠재적 폭발.” 기우는 노트를 덮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린 이제 단순한 침입자가 아니라, 협상의 인질이야. 남궁은 우리를 필요로 하고, 우린 남궁을 두려워하면서도 의존한다.”
집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그 고요는 평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두 주인이 서로를 인정하지 않은 채 공존하는 불안한 정적이었다. 네 가족은 모두 알았다. “우린 균열 위의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그 동맹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