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부 — 균열 속의 귓속말

17부 — 낮의 미묘한 흔들림

남궁이 이름을 밝히고 나서부터 집은 점점 더 미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 윤가의 일상은 여전히 평온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고, 부부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네 가족에게 이 집은 더 이상 단순히 ‘기회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남궁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림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

다은은 부엌에서 채소를 다듬으면서도 지하 계단 쪽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칼끝이 도마에 닿는 소리 너머로, 희미한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손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그러나 들려오는 건 단순한 착각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석민은 운전을 하면서도 거울을 통해 뒷좌석을 계속 확인했다. 아이들이 장난을 치며 웃을 때도, 그는 백미러 속 그림자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의 머릿속에는 지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균형은 오래 가지 않아.” 그 말이 마치 예언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성호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다시 살펴봤다. 이번에는 계단 아래에 ‘눈을 가진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전까지는 단순히 그림자였던 존재가, 점점 뚜렷한 형체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손으로 그림을 가만히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아이들은 이미 그를 본 거야.”

기우는 과외 중 아이의 무심한 말에 몸이 굳었다. “어제 꿈에 어떤 아저씨가 계단에서 절 지켜보고 있었어요.” 아이는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기우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속으로는 차갑게 굳은 채로. “그는 더 이상 숨어 있지 않아. 이 집 전체에 퍼지고 있어.”

17부 — 귓속말의 시작

그날 오후, 네 가족은 계단 앞에 모였다. 문틈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는 요즘 불안하군.” 다은은 움찔하며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당신은 우리에겐 여전히 낯선 사람이에요.”

남궁은 낮게 웃었다. “…낯설다니. 난 이 집의 주인이야. 너희가 오기 훨씬 전부터 이곳을 지켜왔어. 너희는 손님일 뿐이지.”

석민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당신에게 필요한 걸 주고 있잖아요. 물, 음식, 책… 우릴 손님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남궁이 낮게 속삭였다. “…흥미롭군. 손님이 주인과 거래를 한다. 하지만 기억해라. 균형은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걸.”

기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왜 우리와 이렇게 대화하는 거죠? 그냥 조용히 지낼 수도 있잖아요.” 남궁은 잠시 침묵하다가 낮게 대답했다. “…너희가 내 균형을 깨웠으니까. 너희가 날 불러낸 거야.”

그의 목소리는 귓속말처럼 가늘었지만, 네 가족의 등골을 차갑게 만들었다.

17부 — 남궁의 과거 단편

며칠 후, 남궁은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문틈 너머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이름을 왜 남궁이라고 불렀는지 아나? 난 원래 이 근처에서 살았어. 성공한 적도 있었지. 하지만 한순간에 무너졌어. 빚더미에 앉고, 사람들에게 쫓겼지. 결국 갈 곳이 없어 이 집에 숨어들었어. 그게 내 유일한 선택이었어.”

다은은 숨을 죽였다. 그의 말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이 집을 단순한 은신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마지막 보루로 여겼다.

석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린 지금 이 집을 통해 꿈을 꾸고 있는데, 그는 이 집을 통해 살아남았어. 우리의 욕망과 그의 절박함이 부딪히고 있어.”

성호는 공책에 기록했다. “남궁 — 과거: 빚, 추적, 도피. 현재: 집과 동일시. 위험성: 점차 커져가는 요구와 자기 정당화.”

기우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묘한 동정심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알고 있었다. 그 동정은 위험했다. 그를 인간으로 인정하는 순간, 협상은 더 이상 단순한 거래가 아니라, 얽힘이 되어 버릴 테니까.

17부 — 무너지는 균형

밤이 되자 네 가족은 거실에 모였다. 성호가 무겁게 말했다. “이제 우린 선택해야 해. 계속 협상을 이어갈 건가, 아니면… 단절해야 하나.”

다은은 고개를 저었다. “단절은 불가능해. 이미 너무 많은 걸 나눴어. 이제는 우리도 그와 얽혀버렸어.”

석민은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며 말했다. “그럼 우린 뭐죠? 주인도 아니고, 손님도 아니고… 협상의 인질인 겁니까?” 기우는 낮게 대답했다. “맞아요. 우린 인질이에요.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해요.”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모두가 알고 있는 진실이 숨어 있었다. 남궁과의 공존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고, 그의 존재는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날 밤, 문틈에서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알게 될 거다. 누가 진짜 주인인지.” 네 가족은 몸을 떨었다. 균열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17부 - 균열 속의 귓속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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