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사다리의 두 번째 칸

2부 — 빗속에서 열린 운전석

폭우가 골목을 씻어 내리던 오후,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와 동시에 차인정의 다급한 목소리가 인터폰을 타고 내려왔다. “혹시 면허 있다고 하셨죠? 기사분이 오늘은 연락이 안 돼요.” 석민은 심장이 가볍게 솟구치는 걸 눌러 담고 “가능합니다”라고 짧게 답했다. 운전석에 앉는 일은 단순히 차를 움직이는 기술이 아니라, 집의 리듬에 맞아 들어가는 의식이었다. 시트 포지션을 잡고 백미러를 맞추는 사이, 그는 눈동자만으로 콘솔의 생활 흔적을 훑었다. 조수석 수납함에 접힌 영수증 뭉치, 기어 노브 근처에 엷게 남은 방향제 얼룩, 대시보드 위 세워 둔 가족 사진의 각도. ‘사소함은 습관의 표정이다.’ 그는 비 내리는 도로에 부드럽게 합류하면서 브레이크를 두 번 나눠 밟았다. 차 안이 기우뚱하지 않도록 속도를 빼자, 차인정의 어깨가 눈에 띄게 풀렸다. “안정적으로 몰아 주시네요.” 그 말은 칭찬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신뢰’라는 통행증이었다.

라디오에서 클래식 선율이 흐르자 아이들의 대화가 유리처럼 투명해졌다. 소연은 다음 주 모의면접을 걱정했고, 이안은 축구부 선발전을 입에 올렸다. 차인정은 전화로 남편의 일정을 조정하며 “금요일엔 본가에 들러야 한다”고 말했다. 운전석은 집 바깥 세상의 궤도를 한눈에 읽을 수 있는 자리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와이퍼가 마지막 물기를 쓸어 내렸다. 차문이 닫히고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동안, 석민은 마음속 사다리의 두 번째 칸을 손끝으로 눌러 보았다. 아직 약하지만 충분히 몸을 올려도 부러지지 않을 것 같은 탄력. 그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안심은 기술에서 나오고, 기술은 관찰에서 나온다.”

2부 — 안심을 만드는 기술

이후로도 그는 픽업과 심부름을 간헐적으로 맡았다. 맡을 때마다 작은 체크리스트를 업데이트했다. 출발 전 타이어 공기압, 주차장 센서 위치, 집 앞 경사로의 젖은 낙엽 분포, 골목 초입에 서는 택배 트럭의 시간대. 그는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 ‘예상 가능한 사람’이 되었다. 예상 가능함은 상류의 공간에서 가장 비싼 미덕이었고, 동시에 외부인을 오래 머물게 하는 유일한 전략이었다. 어느 날 비슷한 폭우가 다시 도시를 덮었을 때, 그는 일부러 라디오를 껐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삼아, 차간거리와 제동 타이밍을 평소보다 한 호흡 길게 가져갔다. “차가 미끄러지는 느낌이 없네요.” 차인정의 말에 그는 가볍게 웃었다. “빗길에는 음악보다 와이퍼 소리가 정확해서요.” 그 ‘정확함’이라는 단어가 차 안의 공기를 단단하게 묶었다.

정확함은 운전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픽업 시간 사이사이에 집 근처 카페에서 일정표를 만들었다. 아이들 학원 루트, 도로 공사 구간, 야구장 홈게임 날의 교통 체증 예측치. 스스로에게만 보이는 지도 위에 빨간 점과 푸른 선을 덧칠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지도를 접어 포켓에 넣고, 그는 매번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행동했다. 일이 곧 태도가 되고, 태도가 신뢰를 낳았다.

2부 — 빈틈을 기록하는 사람

그는 기존 운전기사의 빈틈도 잊지 않았다. 쓰레기봉투를 대충 던지던 버릇, 뒷좌석 아이들의 질문을 건성으로 넘기던 태도, 주말 야간마다 비슷한 시간에 걸려오는 수상한 통화. 누군가를 끌어내리겠다는 목적만으로 관찰하는 것은 위험했기에, 그는 ‘내가 채워 넣을 빈자리’라는 쪽으로 기록을 돌렸다. 그리고 언젠가 그 빈자리가 실제로 생겼을 때, 자신이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증거로 꺼낼 수 있도록, 말 대신 루틴을 쌓았다. 그가 알아챈 작은 변주는 오래지 않아 변곡점이 되었다. 회사의 차고지 규정이 바뀌면서 운전기사가 다른 팀으로 이동했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집은 가장 ‘예상 가능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석민은 그 손을 잡았다. 사다리의 두 번째 칸은 이제 매일 밟는 계단이 되었다.

2부 - 사다리의 두번째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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