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 균열의 시작, 안심의 값

4부 — 말보다 먼저 고개를 끄덕이는 법

성호는 늘 말이 적은 사람이었다. 반지하의 눅눅한 공기 속에서도 그는 불필요한 말을 덜어내며 살았다. 하지만 침묵이 곧 무능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표정을 읽고, 고개를 끄덕여야 할 순간과 눈을 피해야 할 순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런 태도는 윤가(尹家)의 집 안에서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했다.

아이들과의 첫 만남에서도 그는 군더더기 없는 접근법을 택했다. 색연필을 세 가지 색으로만 제한하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선을 긋게 했다.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지루하지도 않은 방식. 그는 그림 속에서 아이들이 지닌 불안을 구체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대신 “선이 단단하네, 피곤해 보이지 않아”와 같이 부모가 듣고 싶어 하는 안전한 문장을 내놓았다. 부모가 원하는 것은 사실 진단이 아니라 위로였다. 그리고 위로는 때로 의학적 근거보다 더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차인정은 그 말에 안도했고, 아이들 또한 큰 부담 없이 ‘치료’라는 명목을 즐겼다.

성호는 스스로의 역할을 최소화하면서도 존재감을 지웠다. 그의 전략은 단순했다. “내가 있음을 알리되, 내가 필요함을 강조하지 않는다.” 존재는 필요에 의해 소환되고, 필요는 곧 신뢰로 이어진다. 그는 말 대신 고개를 먼저 끄덕임으로써, 이미 ‘동의와 이해’를 선점한 뒤 차분히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화는 늘 현실이 되었다.

4부 — 균열은 가장 조용한 곳에서 자란다

네 가족이 모두 이 집에 들어와 각자의 껍데기를 쓴 이후, 오히려 그들 사이의 연대는 조금씩 흐트러졌다. 반지하에서는 서로의 기침 소리까지 나누며 살았던 이들이, 이제는 각자 다른 공간과 역할 속에서 분리된 듯 움직였다. 석민은 운전석에서 얻은 대화와 정보를 혼자 품었고, 다은은 금지된 문 앞에서 느낀 기묘한 정적을 마음속 깊이 묻어 두었다. 성호는 아이들의 그림 속 단서를 홀로 해석하며, 가족에게 굳이 전하지 않았다.

이런 균열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차곡차곡 쌓여 갔다. 작은 균열일수록 소리 없이 자라고,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법이다. 특히 안도와 평화가 클수록, 균열의 그림자는 더 짙어졌다. 차인정의 “정말 편해졌어요”라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경고처럼 들리기도 했다. 편안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이 그들을 옥죄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 간의 대화마저 줄어들었다. 반지하 시절에는 밤마다 모여 계획을 세우며 서로의 숨을 맞추었지만, 이제는 각자 다른 층에서 다른 시간을 보내며 눈짓으로만 확인했다. 성공은 분명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그만큼 균열이 번지는 속도도 빨라졌다.

4부 — 안심의 값과 그 부담

윤가가 그들에게 준 것은 ‘안심’이었다. 아이들이 안전하다는 안심, 집안일이 매끄럽게 돌아간다는 안심, 운전이 안정적이라는 안심. 그러나 그 안심은 공짜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항상 호출에 대비해야 했고, 누군가는 스스로의 일정을 포기해야 했다. 작은 실수 하나조차 치명적일 수 있었기에, 그들은 늘 예행연습을 하듯 긴장 속에서 움직였다.

석민은 이 부담을 가장 먼저 체감했다. 어느 날 야간 픽업을 마친 후 집 앞 경사로를 내려오며 브레이크를 밟았을 때, 그의 발끝이 잠깐 떨렸다. 이는 긴장이 아니라 익숙함이 만든 위험이었다. 익숙함은 경계를 낮추고, 낮아진 경계는 곧 재앙의 입구가 된다. 그는 카페에 들러 노트를 펼치며 스스로에게 벌칙을 주듯 메모했다. “내일은 와이퍼 교체. 다음 주엔 타이어 점검. 빗길 운전은 제동 간격 두 배로.” 그 메모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잡는 의식이었다.

성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림 해석에서 실수를 줄이기 위해 그는 밤마다 인터넷을 뒤지며 최신 연구를 찾아봤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런 질문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누군가의 삶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덜 위태롭게 하기 위해서다.” 그는 결국 깨달았다. 안심의 값은 높아지고 있었으며, 그 값을 지불하는 것은 고스란히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그날 밤, 성호는 창밖의 불빛을 오래 바라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큰 집은 배가 커. 한 번 삼키면 천천히 소화하지.” 이 말은 곧 가족 모두가 체감해야 할 예언이었다.

4부 - 균열의 시작, 안심의 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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