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 심연의 기록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딘 순간
왼쪽 길은 상상 이상으로 깊고 차가웠다. 바닥에 고인 물은 무릎까지 차올랐고, 벽은 곰팡이와 녹슨 철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은서는 손전등을 꺼내 들었지만, 빛은 금세 젖은 공기에 삼켜졌다. 그녀의 숨소리가 커져만 갔다.
“선생님… 혹시 잘못 온 거 아닐까요?”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잘못된 길은 없어. 다만 누가 설계했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지.”
은서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설계자들… 결국 아빠도 그들과 함께 있었던 걸까요?” 나는 침묵했다. 대답을 쉽게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박해문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행방불명자가 아니라, 사건의 심장에 가까운 인물이라는 것.
벽에 남은 기록
한참을 걷자, 통로 벽면에 이상한 흔적들이 나타났다. 낡은 분필로 그려진 것 같았지만, 빗물에도 지워지지 않고 선명했다.
첫 번째 벽에는 숫자 308이 반복되어 있었다. 크기도, 방향도 다 달랐지만 같은 숫자가 계속해서 나타났다. 은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숫자… 아빠가 자주 말하던 시간이에요. 새벽 세 시 팔 분. 항상 그때 연구실에서 뭔가 실험을 했어요.”
두 번째 벽에는 인물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그중 일부는 검은 줄로 지워져 있었다. 지워지지 않은 이름 중에는 분명히 박해문이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 이름을 따라가며 말했다. “네 아버지는 단순한 연구원이 아니었어. 그는 명단의 중심에 있었어.”
세 번째 벽에는 짧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선택은 없다. 그러나 증언은 남는다.”
은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럼… 아빠는 진실을 남기려 했던 걸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하지만 남긴다는 건 곧 추적자를 불러온다는 뜻이지.”
설계자의 흔적
통로 끝에는 녹슨 금속문이 있었다. 손잡이는 차갑고 무거웠다. 나는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쪽에서 곰팡내와 종이 냄새가 몰려왔다.
방 안에는 오래된 서류 뭉치와 카세트테이프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지만, 일부는 최근에 누군가 건드린 흔적이 보였다.
은서는 서류 하나를 집어 들었다. 표지에는 “H-308 실험 기록”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선생님… 이건 아빠 글씨예요.” 나는 서류를 받아들고 천천히 읽었다. 실험 기록에는 피험자들의 반응, 공포 상황에서의 심리 변화, 그리고 ‘어쩔 수 없다’라는 문장을 강제로 반복하게 한 실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읽을수록 소름이 돋았다. 실험은 단순한 심리 연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선택’을 지워버리고, ‘포기’를 주입하는 방식이었다.
“이건… 기억을 지우는 게 아니라, 무력감을 설계하는 연구였어.”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은서는 얼굴을 감싸쥐었다. “아빠가 이런 걸 했다니… 믿을 수 없어요.”
침입자
그때, 방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은서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문틈 아래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누군가 손전등을 들고 다가오는 중이었다.
나는 재빨리 은서를 책상 밑으로 숨기고, 자신도 어두운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검은 코트를 입은 사내가 들어왔다. 역시 코트 소매에는 ∞ 모양의 은색 핀이 달려 있었다.
그는 방 안을 훑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역시 여기였군. 박해문이 남긴 쓰레기들.”
그는 책상 위의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은서가 무심코 숨을 고르는 소리를 냈다. 사내의 고개가 곧장 돌아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책 더미를 걷어차며 소음을 냈다. 사내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린 순간, 은서를 붙잡고 방 뒤편의 작은 문으로 달렸다.
사내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다. “…도망쳐도 소용없다! 선택은 이미 끝났어!”
심연의 기록
우린 어두운 통로를 달렸다. 발밑에서 물이 튀었고, 머리 위로 낙수가 폭포처럼 떨어졌다. 숨이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은서는 달리면서도 녹음기를 꼭 쥐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두려움 속에서도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선생님… 이제 확실해요. 아빠는 설계자였어요. 하지만 동시에… 증인이기도 했어요. 그가 남긴 기록은 우리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야. 기록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 하지만 그 전에… 우릴 쫓는 자들을 따돌려야 해.”
우린 다시 갈림길에 섰다. 이번에는 세 갈래였다. 왼쪽은 더 깊은 심연으로, 가운데는 위로 향하는 계단으로, 오른쪽은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 수평 통로였다.
나는 은서를 바라봤다. “은서, 이번엔 네가 선택해. 아버지가 남긴 길은 네가 열어야 해.”
은서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계단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위로 올라가야 해요. 심연에만 머무르면 우린 끝내 갇히고 말아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심연에서 기록을 얻었으니, 이제는 세상 위로 나갈 차례다.”
우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위로 향하는 길은 좁고 미끄러웠지만,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단순한 탈출구가 아니라, 더 큰 폭풍을 예고하는 신호였다.
심연의 기록은 이제 우리 손에 있었다. 그러나 기록은 증언일 뿐, 싸움의 시작은 아직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