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 갈림길의 밤
어둠 속의 신호
빗줄기는 여전히 도시를 덮치고 있었다. 은서와 나는 폐선로를 벗어나 좁은 골목길로 몸을 숨겼다. 벽돌 틈 사이로 흐르는 빗물이 작은 폭포처럼 쏟아졌고, 하수구에서는 물이 역류해 바닥 전체가 무너져 내릴 듯 흔들렸다. 숨을 고르며 귀를 기울이자, 저 멀리서 타이어가 물을 가르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검은 세단이 근처까지 다가온 것이다.
나는 은서의 손목을 잡고 벽 쪽으로 바짝 붙였다. 그녀는 두려움으로 떨면서도 녹음기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 작은 기계가 우리의 생존을 증명하는 유일한 열쇠 같았다.
잠시 후, 골목 끝에서 빛이 번졌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벽을 훑고 지나갔고, 순간 은서의 얼굴이 환하게 드러났다. 나는 황급히 그녀를 끌어안아 그림자 속에 숨겼다. 차는 곧장 지나갔지만, 내 귀에는 아직도 엔진음이 남아 있었다.
“선생님… 이대로는 계속 쫓길 거예요.” 은서가 속삭였다. “맞아. 하지만 쫓기는 게 전부는 아니야. 우리가 그들의 신호를 먼저 읽어야 해.” 나는 주머니에서 젖은 신문을 꺼냈다. 그 위에는 여전히 308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건 단순한 낙서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지하의 길
우린 골목 끝에 놓인 낡은 철문을 열고 지하 통로로 내려갔다. 지하실은 곰팡내와 녹슨 철 냄새로 가득했고, 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일정한 간격으로 울려, 마치 거대한 시계가 우리를 조율하는 듯했다.
“여긴 뭐 하는 곳이에요?” 은서가 물었다. 나는 벽을 손으로 짚으며 대답했다. “예전에 지하철 공사하려다 중단된 통로야. 지금은 지도에도 안 남아 있지.”
우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물 위로 발자국이 남았고, 어둠 속에서 쥐들이 달아났다. 통로 벽에는 낡은 포스터와 이상한 기호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 모양과 함께 적힌 문구.
“선택은 없다. 설계된 길만 존재한다.”
은서가 숨을 삼켰다. “설계자들… 여기까지 온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그들의 무대에 발을 들인 거지. 하지만 무대 위에서 배우가 대사를 바꿀 수도 있어.”
추적자의 그림자
통로 끝에서 발자국 소리가 겹쳐졌다. 은서와 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어둠 속에서 다가왔다. 그 역시 우산을 들고 있었고, 코트 소매 끝에는 은색 핀이 달려 있었다. 설계자의 하수인이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순간, 은서가 발을 헛디뎌 물을 튀겼다. 사내의 시선이 곧장 이쪽을 향했다. 나는 재빨리 은서를 벽 쪽으로 끌어당기며 낮게 말했다. “움직이지 마.”
사내는 한참 동안 우리 쪽을 노려보다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오래된 라디오였다. 그는 라디오를 켜고 주파수를 돌렸다. 지직거리는 소음 끝에 익숙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3시 8분, 다시 시작된다. 선택은 없다.”
은서가 얼굴을 새파랗게 질렸다. “저 목소리… 아빠예요.” 나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네 아버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글썽였다. “아빠 목소리가 왜 거기서 나와요…?”
폭로된 비밀
사내는 라디오를 끄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멀어지자, 나는 은서를 붙잡고 말했다. “네 아버지… 박해문. 그가 설계자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거야.”
은서의 손이 떨렸다. “아빠는… 실험실에서 일했어요. 사람들의 심리를 기록하는 연구를 했죠. 하지만…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모든 게 이상해졌어요.”
나는 눈을 감았다. 퍼즐 조각들이 조금씩 맞춰지기 시작했다. H-308, 설계자, 그리고 박해문. 모두가 같은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럼 상자 속 녹음은 네 아버지가 남긴 증거일지도 몰라. 설계자들의 실체를 밝히는 단서.” 은서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린 도망치는 게 아니라… 찾아야 해요. 진실을.”
나는 은서의 손을 꽉 잡았다. “그래. 하지만 우리가 찾는 진실은 위험해. 그들은 우리가 입을 열기 전에 우릴 지워버리려 할 거야.”
갈림길의 밤
지하 통로는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왼쪽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이어졌고, 오른쪽은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우리는 잠시 멈춰 섰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죠?” 은서가 물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왼쪽은 위험하지만 진실에 가까울 거야. 오른쪽은 안전하지만… 우릴 계속 도망자로 남기겠지.”
은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 전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아빠의 목소리를 따라가고 싶어요.”
나는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왼쪽이다. 갈림길에서 우린 이제 선택을 했다.”
그 순간, 다시 엔진음이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지하가 아니라 위에서였다. 세단이 골목 위를 돌아다니며 우리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은 이미 정해졌다.
우린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갈림길의 밤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선택은 이미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