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 빗속의 추적자
흔적을 따라온 그림자
비는 밤새 그칠 줄 몰랐다. 도로 위에는 물웅덩이가 거울처럼 번졌고, 네온사인 불빛이 뒤섞여 흐릿한 색의 강물처럼 출렁거렸다. 은서와 나는 다방에서 나와 잠시 우산을 접었다. 어둠 속에서 우산조차 눈에 띌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바람은 차가웠고, 우리의 호흡은 짙은 김으로 퍼져나갔다.
은서는 나보다 한 발짝 뒤에서 걷고 있었다. 그녀의 신발이 물웅덩이에 빠질 때마다, 파문이 퍼지며 또 다른 그림자가 겹쳐졌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멀리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헤드라이트가 보였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검은 세단이었다. 낮에도 우리를 따라오던 그 차.
“선생님… 또 왔어요.” 은서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이었지만, 나는 분명히 들었다. “알아. 하지만 지금은 도망치는 게 전부가 아니야. 우리를 쫓는 자가 누구인지, 왜인지 알아야 해.”
은서가 고개를 저었다. “무섭지 않으세요?” 나는 짧게 웃으며 대답했다. “무서우니까 더 확인해야 해. 무서움을 모른 척하면 결국 잡히는 거야.”
빗물은 점점 더 굵어졌다. 골목마다 흘러내린 물이 시냇물처럼 흐르고, 그 위로 우리 발자국이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 흔적은 오래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람의 발자국은 빗물보다 오래 남는다. 추적자는 그것을 따라온다.”
폐선로의 약속
우리는 서쪽으로 꺾어 오래전에 끊긴 철길로 향했다. 녹슨 레일 위에는 빗방울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며, 마치 시계의 초침처럼 시간을 새겼다. 은서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낮게 물었다. “이 길… 어디로 이어지나요?”
나는 빗속에서 레일을 밟으며 대답했다. “끝나지 않는 곳. 폐선은 종착역이 아니라, 기억을 묻는 장소지.”
철길 옆 컨테이너 벽에는 오래된 포스터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빛바랜 글씨, 찢어진 광고지, 그리고 유난히 선명한 문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설계자 연합 — 진실은 기록 속에 있다.”
포스터 한쪽에는 QR 코드가 있었지만, 절반이 찢겨 있었다. 은서가 손끝으로 그 자국을 만지며 말했다. “누군가 일부러 지운 거예요. 절반만 남기고.”
나는 빗물을 닦아내며 대답했다. “지워졌다는 건, 누군가 남겼다는 뜻이기도 해. 완전한 삭제는 존재하지 않아. 우리는 남은 흔적을 따라가야 해.”
은서는 잠시 멈춰 서더니, 어깨를 움츠리며 물었다. “근데… 만약 우리가 찾는 게 진짜 위험한 거라면요? 선생님도 두렵지 않으세요?” 나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두렵지 않으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두려움은 때때로 길을 알려주기도 해.”
추적자와의 첫 대면
철길이 끝나는 지점,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멈춰섰다. 빗속에 묻히는 듯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메아리가 아니었다. 우리의 뒤를 따라오는 제3의 존재였다. 은서는 손에 쥔 작은 녹음기를 꽉 움켜쥐었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상자는 잃었어도, 목소리는 아직 우리 쪽이야.”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검은 우산을 쓴 사내가 서 있었다. 코트 소매 끝에는 ∞ 모양의 은색 핀이 달려 있었다. 은서의 입술이 떨렸다. “설계자…?”
사내는 입꼬리를 올렸다. “우린 이름을 쓰지 않아. 단지 증명하지. 어쩔 수 없다는 문장 앞에서, 누가 선택을 가졌는지.”
나는 발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우린 아직 선택을 놓지 않았어.” 사내는 고개를 저으며 낮게 웃었다. “그럼 왜 3:08을 따라 걷고 있지? 이미 네 발자국은 도장처럼 찍혀 있는데.”
그의 말에 은서의 눈이 커졌다. “3:08…? 또 그 시간이야.” 나는 숨을 고르며 사내를 똑바로 바라봤다. “너희가 말하는 3:08, 그게 뭔지 밝히지 않으면 우린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아.”
사내는 빗속에서 고개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3:08은 시작이자 끝. 누가 지배하고, 누가 무너지는지가 그때 결정된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은서의 손이 녹음기를 더 꽉 움켜쥐었다. 사내의 눈빛은 그것을 향해 번뜩였다. “증거를 넘겨라. 그렇지 않으면, 누가 증인이 되는지 곧 알게 될 거다.”
빗속의 협상
나는 일부러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빗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손은 떨리지 않았다. “증거를 넘겨달라 했지? 하지만 그건 우리 손에 있는 게 아니야. 그것은 이미 누군가의 귀에 들어갔어. 네가 찾는 건 단순한 상자가 아니라, 시간 자체야.”
사내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는 곧 다시 웃었지만, 눈빛만큼은 흔들리고 있었다. “…네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곧 알게 되겠지.”
은서가 내 옆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선생님, 이제 어떡해요?” 나는 낮게 대답했다. “우린 지켜야 해. 빼앗기는 순간, 우린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멀리서 검은 세단의 엔진음이 다시 살아났다. 금속이 갈리는 소리, 타이어가 빗물을 가르는 소리. 그것은 협상의 끝이자 새로운 추적의 시작이었다.
폭풍 전야
사내는 우산을 접으며 뒷걸음질쳤다. 빗물이 그의 어깨와 머리를 적셨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을, 결국 네 입으로 하게 될 거다.”
그는 검은 세단 쪽으로 걸어갔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은서는 무릎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나는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이제 우린 더 조심해야 해. 선택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어. 하지만 시간이 우리 편은 아니야.”
은서는 눈물을 닦으며 속삭였다. “3:08… 그게 뭘까요? 왜 계속 그 시간이 나오는 걸까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시간이 다가올수록 우리 앞의 길이 좁아진다는 거다.”
우린 다시 철길을 따라 걸었다. 빗물은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고, 어둠은 더 짙어졌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나는 은서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빗속의 추적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었고, 언제든 다시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우린 이제 단순히 도망자가 아니었다. 우린 선택을 가진 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