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잃어버리는 기술
비를 가르는 검은 세단
유리문을 밀고 나오자, 검은 세단의 와이퍼가 한 번 더 유리를 긁었다. 헤드라이트는 우리를 향해 천천히 올라왔다가 멈췄다. 나는 우산을 기울여 은서를 가리고, 차 창문으로 두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둘, 그리고 늦었다’—뒤를 보지 말고 직진하라는 신호였다. 은서는 한 박자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차 안의 그림자는 창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전조등만 껐다 켰다. 마치 우리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말을 아끼는 쪽을 택했다. 비명 대신 발소리가 도시의 귀에 오래 남는다. 우리는 모퉁이를 돌아 골목을 세 번 꺾었다. 뒤를 보지 않았지만, 물웅덩이의 파문이 우리를 쫓는 타이어의 방향을 알려주었다.
다방 옆 블록에는 오래된 코인세탁소가 있었다. 하얀 불빛과 건조기의 원이 서로를 비추는 공간. 나는 문을 열고 빈 건조기 문 하나를 열어 두었다. 은서에게 상자 대신 녹음기를 건넸다. “무게를 바꾸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자는 지하 선반에 있고, 그쪽은 우리를 ‘상자’로 추적할 거야. 오늘은 목소리를 미끼로 쓰지.” 나는 녹음기를 헝겊 주머니에 싸서 건조기 가장 깊은 곳에 밀어 넣고, 시간 다이얼을 3:08에 맞춰 두었다. 둔탁한 모터음이 돌아가자, 금속통 안에서 ‘H’의 스티커가 희미하게 빙글 돌았다. 은서가 낮게 물었다. “그럼 우리는?” “우린 반대편으로 사라진다. 잃어버리는 척, 잃어버린다.”
거울, 시간, 그리고 이름
우리는 역방향으로 골목을 더듬어 다시 회색 건물 쪽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느리게 기침했지만, 5층 버튼은 쉽게 들어갔다. 해문 심리연구실 문 안쪽에는 우리가 남긴 습기 자국이 아직 덜 말라 있었다. 나는 전신거울 앞에 섰다. 거울 가장자리에 손을 대자 미세한 물기가 손바닥에 번졌다. “거울은 정직해. 이 방을 드나든 손의 온도를 기억하지.” 은서는 숨을 고르며 벽의 명함철을 다시 뒤졌다. 그 끝에서 꺼낸 카드 한 장—박해문 이름 옆에 얇은 연필글씨가 비스듬히 얹혀 있었다. “H-308, 외부조정 YJ와 분리.” 은서가 속삭였다. “YJ… 선생님?” 나는 답 대신 웃었다. “누가 썼든, 이제 과거형이면 돼.”
서랍 깊은 곳에서 붉은 실이 한 올 빠져나와 손등에 감겼다. 실 끝에는 작은 금속 링이 달려 있었고, 링 안쪽에는 숫자 8이 옆으로 누워 있었다. 무한대. “결정은 끝나지 않는다.” 나는 실을 접어 주머니에 넣고, 탁상시계를 들어 올렸다. 멈춘 시각 3시 08분. 뒤판의 배터리 커버는 억지로 비틀어 열 수 있게끔 마모돼 있었다. 커버를 여니, 얇은 종이조각이 접혀 들어 있었다. “금천교 동측, 달력 없는 가판, 빗물 계단 삼칸 아래.” 누군가에게는 지도, 누군가에게는 재판장이 될 장소.
엘리베이터 앞에서 은서가 물었다. “해문은 왜 사라졌을까요?” “사라진 게 아니라, 없어진 걸 수도 있지.” 내가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라짐은 실수고, 없어짐은 결과야. 누군가가 어떤 ‘어쩔 수 없음’을 증명하려면, 증인도, 설계자도, 장부도—모두 어딘가에서 안 보이는 게 편하거든.”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박해문은 설계자예요? 피해자예요?” “둘 다일 수 있어. 중요한 건 네가 더 이상 둘 중 하나만 택하지 않는다는 거.”
잃어버리는 법을 배운 밤
우리는 다시 바깥으로 내려왔다. 비는 잠깐 느려졌고, 도시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해졌다. 코인세탁소의 건조기는 여전히 낮게 둥둥거렸다. 창 너머로 검은 세단의 실루엣이 또렷해졌다 희미해졌다. 나는 시간을 봤다. 3시 02분. 여섯 분이 우리의 여유였다. “은서, 기억해. 잃어버린다는 건 던지는 게 아니야. 다시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천천히 미끄러뜨리는 것이지.” 그녀가 끄덕였다. “어디로요?” “관성. 사람들의 습관 속. 예를 들어—누구나 ‘가판’을 지나면 발을 멈추지. 비가 오든 말든.”
우리는 금천교 동측으로 갈라지는 인도에 섰다. 달력 없는 신문 가판이 비닐 차양 아래 젖어 있었다. 나는 차양에서 떨어지는 물의 간격을 셌다. 네 박자마다 한 번, 깊게 떨어졌다. 계단은 삼칸, 비는 네 박자. “지금.” 나는 은서의 팔을 가볍게 눌렀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서며 가판 뒤쪽 틈으로 사라졌다. 나는 가판 앞에서 신문을 넘기는 척 헤드라이트를 맞았다. 검은 세단이 다가와 천천히 멈췄다. 창이 반쯤 내려가며, 익숙하게 매끈한 목소리가 빗물과 함께 흘렀다. “잃어버린 걸 찾으러 왔습니다.”
“그럼 잃어버린 게 있어야겠군요.” 내가 말했다. 그는 짧게 웃었다. “상자. 그리고 H-308.” 나는 어깨를 젓고 신문을 접었다. “상자는 지하의 습기 속에서 잘 쉬고 있고, H는 건조기에서 여전히 선회 중이죠. 근데 오늘 당신들, 시간을 잃었어.”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시간?” “3시 08분이란 키. 당신들이 맞춰 들어오는 그 문. 오늘은 내가 먼저 열었거든.” 잠깐의 정적 뒤, 창이 닫혔다. 세단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움직였다. 나는 숨을 내쉬고 가판 뒤를 툭 쳤다. 은서가 그림자처럼 나왔다.
건조기의 다이얼이 3:08을 통과하자마자 멈췄다. 문을 열어 헝겊 주머니를 꺼내며 나는 말했다. “지금부터 이건 네 거다. 가져갈 건 가져가되, 내일 새벽이 되면 또 잃어버려.” 은서가 고개를 저었다. “계속 숨기기만 하면, 영원히 끝나지 않아요.” “그래. 그래서 내일은 말을 섞겠지. 잃어버리는 말, 찾아내는 말, 그리고 네 말.”
그녀가 녹음기를 쥐고 숨을 들이켰다. “선생님, 저는 어제까지 ‘어쩔 수 없다’가 제 방패였어요. 오늘은… 그걸 내려놓을게요.” “방패를 내려놓으면 맞는다.” “그래도, 누굴 밀진 않잖아요.” 그 한마디가 비보다 무거웠다. 나는 우산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좋아. 그럼 약속 하나 더. 누가 네 등을 밀면, 네가 먼저 뒤를 돌아봐. 누가 서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 네 문장을 만들자.”
우리는 다방으로 돌아와 지하 보관창고 문을 다시 잠갔다. 주인은 무슨 말인지 묻지 않았고, 대신 거울 닦는 천을 내주었다. “오늘은 이게 제일 필요해 보이네.” 그녀가 웃지 않고 말했다. 은서가 천을 받아 거울의 습기를 닦았다. 손자국이 사라지자, 거울은 비로소 우리 둘을 똑바로 비췄다—젖은 어깨, 젖지 않은 눈동자.
밤이 더 깊어졌다. 다방 유리창에 부딪히는 비는 글자처럼 흩어졌다 모였다. 나는 노트를 펼쳐 두 번째 줄을 적었다. “2부—잃어버리는 기술: 상자는 남겨두고, 시간과 발자국을 훔친다. 3:08—문의 패스키. 박해문—지도 혹은 재판장. 은서—방패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마지막 줄. “내일, 질문을 바꾼다: 어쩔 수 없었나? — 누가 어쩔 수 없게 만들었나?” 은서가 그 문장을 따라 천천히 읽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일은, 제가 묻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