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비가 시작되면 선택은 늦는다

교각 아래 첫 만남

도시는 하루 종일 눅눅했다. 비가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전, 강 위로 걸친 오래된 교각은 쇠 냄새를 내며 울어댔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수습꾼’으로 불린다. 경찰에 신고하기엔 애매하고, 조폭에게 맡기기엔 너무 사적인 문제들—그 사이를 꿰매 붙이는 인간. 오늘 의뢰인은 문자 한 줄만 남겼다. “금천교 아래, 어쩔 수가 없어.”

교각 기둥에 도착했을 때, 검은 비닐 레인코트를 뒤집어쓴 소녀가 서 있었다. 시선은 물로, 두 손은 작은 금속 상자로. 가까이서 보니 손등에 잔 칼자국들이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너가 맞지?”라고 묻자 소녀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수습꾼.” 말끝이 부러졌다. 나는 우산을 기울여 상자에 떨어지는 물을 막고, 가볍게 두드렸다. “이게 문제야?” 소녀는 숨을 들이켰다. “버려야 해요. 안 그럼, 제가 버려져요.”

상자는 군용 탄약통을 잘라 만든 것 같았다. 낡았지만 자물쇠는 새것. 나는 열지 않았다. 대신 소녀의 신발을 봤다. 진창을 피하려다 남긴, 한쪽 짧은 발자국. 누군가를 기다릴 때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쫓길 때 남는 패턴이었다. “왜 나였지?” 묻자 소녀가 말했다. “선생님은 남을 버린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럼, 어떻게 버려지는지도 알겠죠.”

다방 ‘발화’

비가 굵어져 둘의 숨이 젖기 전에, 골목 끝 작은 다방으로 옮겼다. 간판에는 ‘발화’라는 글자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주인은 말수 적고 눈매가 깊은 여자. 우리를 보자 설탕을 넣지 않은 커피 두 잔을 내왔다. 벽엔 유실물 전단과 실종자 안내가 겹겹이 포개져 있었고, 그 가운데 “박해문(49) 실종”이 눈에 띄었다. 소녀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상자를 테이블 아래로 밀어 넣고, 대신 질문을 위로 올렸다. “상자 안에 누가 있어?” 소녀는 한참을 버티다 짧게 말했다. “목소리.” 그녀가 코트 안에서 조그만 녹음기를 꺼냈다. 케이스 뒤에는 ‘H-308’이라는 스티커. 재생 버튼을 누르니 금속성 잡음 뒤로 낮고 평평한 남자 목소리가 흘렀다. “어쩔 수 없다—그 말은 면죄부가 아니라 지시서다. 그 말이 시작되는 순간, 누군가는 등을 돌리고, 누군가는 등을 밀어준다.” 소녀의 목이 말랐다. “저한테 온 거예요.” “왜 너에게?” “그날 제가… 봤으니까.”

주인이 조용히 다가와 설탕 그릇을 놓고 갔다. 설탕알이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에 소녀가 꿈에서 깬 듯했다. “저는 은서예요.” 드디어 이름. “박해문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아니오’보다 ‘모른 척’이 더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녹음기를 멈추고 물었다. “그 상자, 여기 두자. 그리고 넌 당분간 사라져.” 은서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다음은 선생님 차례예요. 보내는 메시지들이 순번을 매겨요. H-308 다음이 H-309겠죠.”

열지 않은 상자

사람은 비밀을 열어야만 산다고 믿지만, 어떤 것들은 닫아둬야 살아남는다. 나는 상자를 굳이 열지 않았다. 대신 내 노트를 펼쳐, 짧게 기록했다. “상자—탄약통 개조 / 자물쇠 신형 / 추적 흔적 있음 / 음성: H / 키워드 ‘어쩔 수 없음’ 반복 / 은서—증인일 가능성 높음.” 그리고 은서에게 말했다. “오늘 밤만 내가 고친다. 그 다음부터 네가 선택해. 도망이든, 기록이든.”

다방 주인이 카운터 아래서 낡은 열쇠를 꺼내왔다. “지하 보관 창고. 오래됐고, 잘 잊혀져.” 그녀는 나와 은서를 번갈아 보더니 낮게 덧붙였다. “빗물은 발자국을 지우지만, 방향은 남기죠.” 한 층 내려가 불을 켰다. 습기 냄새와 오래된 필름 통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상자를 선반에 숨겨두고 올라오려는데, 위층 문종이 딸깍거리며 흔들렸다. 열리진 않았지만 누군가 다가왔다 돌아간 움직임. 누군가 우리를 알고 있다는 뜻.

계단을 다시 오르며 은서가 물었다. “선생님은 정말 누굴 버린 적 있어요?” 나는 대답 대신 우산을 열었다. 비가 커튼처럼 골목을 막고 있었다. “사람은 다 한 번쯤 버린다. 문제는, 버리고 남은 자리가 우리를 따라다닌다는 것.”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전 이제 누굴 못 버려요. 그래서 상자를 버리고 싶었어요.” 나는 “좋아, 그럼 상자 대신 을 버려.”라고 했다. “어쩔 수 없다는 말.”

첫 번째 흔적

다방을 나서려다, 나는 벽의 실종 전단들 중 하나를 떼어 주머니에 넣었다. 박해문—심리상담가, 마지막 위치 ‘금천교’. 은서는 그것을 힐끗 보더니, 내 우산 그림자 안에 바짝 붙었다. 우리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 까만 세단 하나가 코너에 스며들어 섰다가,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비 속으로 사라졌다. 접힌 와이퍼가 비를 두 번 긁어냈다. 번호판은 일부러 가려둔 듯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나는 우산 높이를 낮추며 은서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세 가지만 지켜. 첫째, 상자에 대한 말은 하지 말아. 둘째,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입에서 지워. 셋째, 밤에는 혼자 움직이지 마.” 은서는 묻지 않았다. 약속을 뒤로 미루면 늦는다는 걸 아는 눈이었다. 다만 걸음을 떼기 전에 한 마디. “저 메시지, 매번 같은 목소리였어요. H. 그리고 늘, 같은 시간.” “몇 시?” “3시 08분.”

그 숫자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전류를 느꼈다. 다방에서 본 멈춘 탁상시계도 3시 08분이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시간을 못박고,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 시간에만 문을 연다. 나는 노트에 추가했다. “3:08—패스키.” 은서가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우린… 어디로 가요?” “거울 있는 곳으로.” “거울요?” “거울은 거짓말을 못해. 적어도, 배치를 보여줄 때는.”

거울의 방으로

우리는 강가를 등진 회색 건물의 다섯 번째 층으로 올라갔다. 문패는 떼어졌지만, 접착 자국이 ‘심리’라는 글자를 여전히 배고 있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안에는 비에 젖은 양복 한 벌, 반쯤 먹다 만 과일 통조림, 그리고 키 큰 전신거울이 벽에 붙어 있었다. 거울 표면에는 손바닥 모양의 습기가 꽃처럼 번져 있었다. 누군가 방금 전까지 여기 서 있었다는 증거.

나는 거울 앞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거울은 방 안이 아니라 동선을 비추고 있었다. 출입문에서 옆 탁자로, 탁자에서 서랍으로, 서랍에서 창가로 이어진 잔 흠집들. “정리하지 말고 기억해.” 내가 말하자 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랍을 여니 명함철과 붉은 실 한 타래, 그리고 우리 다방의 스탬프가 찍힌 영수증이 나왔다. 뒤쪽 칸에는 작은 녹음기가 하나 더—은서가 가져온 것과 같은 모델. 테이프에는 흰 라벨이 붙어 있었다. H-308.

우리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대신 곧장 불을 끄고 문 뒤로 숨었다. 복도에서 미세한 고무 구두 소리가 다가왔다. 손잡이가 돌아가고, 문틈으로 비 냄새가 스며들었다. 낮고 매끈한 목소리. “시간 맞췄죠? 3시 08분.” 은서의 손이 내 소매를 세게 잡았다. 나는 숨을 유지하며 두 가지를 동시에 생각했다—첫째, 오늘 밤 상자는 반드시 잃어버려야 한다. 둘째, 잃어버리는 척하면서, 누가 줍는지 본다.


잠깐의 정적 뒤, 그들은 방을 훑다 아무것도 못 찾은 채 돌아섰다. 문이 닫히자 나는 은서에게 속삭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자는?” “지하에 둔다. 내일, 다른 곳에 잃어버리자.” 그녀가 내 얼굴을 똑바로 봤다. “정말 잃어버리면, 끝나요?” 나는 잠시 웃었다. “아니. 다만 시작은 될 거야. ‘어쩔 수 없다’는 말 대신, 우리가 써야 할 첫 문장.”

비가 다시 굵어졌다. 나는 우산을 펴고, 은서의 어깨 위로 비를 걷어냈다. 계단을 내려오며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저는 어제까지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믿었어요.” 나는 대답했다. “대부분 그렇게 살아. 하지만 누군가는 그 말을 가격표로 바꿔 팔지.” 1층 문턱 앞에서 우리는 동시에 멈췄다. 유리문 밖, 검은 세단이 돌아와 있었다. 와이퍼가 한 번 더 유리를 긁고, 멈췄다. 우리를 향해, 아주 천천히.

나는 우산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은서.” 그녀가 눈을 들었다. “오늘 넌 나랑 같이 선택했다. 내일도 그렇게 해. 대신 기억해—비가 시작되면 선택은 늘 늦는다.” 그녀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럼, 지금 해야겠네요.” 우리는 문을 밀고 비 속으로 나갔다. 차의 헤드라이트가 번쩍 켜지고, 골목 끝의 시계가 3시 08분을 지나가고 있었다. 누군가의 발화(發話)가 끝났고, 우리의 문장이 막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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