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 계단 위의 진실
빛으로 향하는 길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가팔랐다. 물에 젖은 신발이 미끄러질 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꽉 잡아야만 했다. 은서의 숨소리는 거칠었고, 나 또한 심장이 귓가를 울릴 만큼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러나 희미한 빛이 점점 가까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조금만 더요…” 은서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거의 다 왔다. 어둠은 끝날 거야.”
그러나 계단을 오를수록 불안은 커졌다. 우리가 향하는 빛은 단순한 출구일 수도 있었지만, 동시에 함정일 수도 있었다. 설계자들이 남긴 흔적 속에서 배운 건 하나였다. 빛이라고 해서 반드시 구원이 되는 건 아니다라는 사실이었다.
낡은 도서관
마침내 계단 끝에 도달했을 때,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은 폐허 같은 공간이었다. 오래된 도서관이었다. 천장은 무너져 있었고, 빗물이 새어 들어와 책들을 적셨다. 습기에 불어난 책장은 무너져 내릴 듯 기울어 있었지만, 여전히 수많은 책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여기가 뭐 하는 곳이었죠?” 은서가 숨을 고르며 물었다. 나는 벽에 새겨진 표식을 가리켰다. ∞ 모양과 함께 ‘아카이브’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야. 이건 기록 보관소야. 설계자들이 세상에 드러내지 않은 기록을 숨겨둔 곳.”
책장 사이로 걸어 들어가자, 기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일부 책들은 페이지마다 숫자 ‘308’이 반복되어 있었고, 또 다른 책들은 완전히 백지였다. 은서가 손끝으로 페이지를 넘기며 중얼거렸다. “이건… 기록이 아니라, 지워진 기억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진실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지워왔어. 선택을 없애려면, 기억부터 없애야 하니까.”
박해문의 흔적
우린 도서관 깊숙한 곳에서 낡은 서류 상자를 발견했다. 서류에는 ‘박해문’이라는 이름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그는 단순히 연구에 참여한 게 아니라, 실험 책임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은서의 손이 떨렸다. “아빠가… 그 중심에 있었다는 거예요?” 나는 종이를 훑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이상해. 어떤 페이지에는 그가 ‘실험 설계자’로 기록돼 있고, 또 다른 페이지에는 ‘내부 고발자’로 지워져 있어.”
은서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아빠는 설계자이면서 동시에 배신자였던 거예요?”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아마도. 그는 그들의 언어로 진실을 남기려 했을 거야. ‘어쩔 수 없다’는 말을 강제로 주입받은 사람들이라도, 기록만은 지울 수 없다고 믿었던 거지.”
침입자들의 등장
우리가 서류를 읽고 있을 때, 도서관의 입구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책장이 쓰러지고, 발자국이 울려 퍼졌다. 은서가 긴장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들이 온 거예요.”
검은 코트를 입은 사내들이 둘이나 나타났다. 그들의 소매 끝에는 역시 은색 ∞ 핀이 달려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다가 동시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은서를 책장 뒤로 숨기며 낮게 말했다. “조용히 있어. 증거를 지키는 게 우선이야.”
사내 중 한 명이 우리 앞에 멈춰 서서 말했다. “그 서류는 설계자의 소유다. 넘겨라.” 나는 종이를 움켜쥐며 대답했다. “진실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야.”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진실은 권력의 소유다. 넌 아직 몰라.”
그 순간, 두 번째 사내가 돌진했다. 나는 책장을 밀어 넘어뜨리며 은서와 함께 도망쳤다. 책들이 쏟아져 내리며 사내들을 덮쳤고, 잠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계단 위의 진실
우린 도서관 뒤편에 숨겨진 또 다른 계단을 발견했다. 이번 계단은 위로 이어져 있었고, 맨 끝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선생님, 저길 통해 나가요!” 은서가 외쳤다. 우린 계단을 전속력으로 뛰어올랐다. 뒤에서 사내들의 발소리가 따라붙었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숨이 가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끝까지 올라갔다.
계단 끝에서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와 함께 도시의 불빛이 눈앞에 펼쳐졌다. 밤은 여전히 비에 젖어 있었지만, 그곳은 지상이었다.
우린 숨을 몰아쉬며 서류와 녹음기를 꼭 쥐었다. 은서는 눈물을 글썽이며 속삭였다. “선생님… 드디어 올라왔어요. 하지만 이제 어쩌죠?” 나는 도시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우린 아직 안전하지 않아. 설계자들은 우리가 지상에 있다는 걸 알 거야. 하지만 적어도 이제, 우리가 싸울 무기를 손에 넣었다.”
그 순간, 멀리서 검은 세단의 헤드라이트가 번쩍였다. 그들은 이미 우리를 추적하고 있었다.
계단 위에서 찾은 진실은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더 큰 폭풍의 시작이었다.